난 왜 그때 그걸 느꼈을까.
석사 입학을 위해 필요한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영어 성적 제출도 마쳤고,
내가 출국할 날짜는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발렌틴은 내가 오는 날만 기대하고 있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의 나의 계획이란 너무나도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인 것이었지만 그때는 현실적이라고, 안될 거 없다고 믿고 있었다.
석사 기간 1년+ 석사 후 주어지는 졸업 비자 2년= 총 3년이 나에게 주어지는 셈인데,
1년 반 동안 한 사람이랑 같이 살았다는 증거가 있으면 파트너 비자라고 1.5년이 더 주어지고, 그 안에
당연히 난 영국에서 뭐라도 하고 있지 않겠어? 라는 마음이었다.
그땐 영국에서 눌러 살아야지, 영주권 따면 우리 가을이(내 반려견)도 데리고 와서 같이 살아야지 하며
판타지 안에서 살았더랬다. 그만큼 난 발렌틴의 존재를 믿고 있었고 내 삶에서의 그의 몫은 이미
너무 커져 있었다. 개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져 있다 보니 현실감각이 조금은
사라져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점은 코로나로 한창 외출도 못하고 사람들도 만나지 못하던 기간이었다. 한편으론 우울했지만
난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그 시간이 가치 있었다. 안타깝게도 아빠는 인도에 계셨지만
왠지 모르게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더 엄마와의 시간, 동생, 가을이와의 시간이 더욱 더 소중해졌고
예전엔 외국에서 2년간 엄마를 안 봐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가족과 보내는 평범한 일상이 이렇게 든든한
것이었구나를 자주 느껴버렸다. 그래서 나의 출국일이 다가오면 다가 올 수록 난 괜히 울적해졌으며 발렌틴과
곧 나누게 될 일상의 행복함을 상상하는 것에서 오는 기대감도 그 울적함을 달래 주지는 못했다.
발렌틴은 이미 내가 작년 겨울에 목격하고 왔던 것처럼 친구들과 너무 잘 지내고 있었고 2019년 1월달에
나와 헤어지며 날 가슴 아프게 하던 '그' 발렌틴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다행이었지만 또 서운했다고 하면 내가 나쁜 사람이려나? 난 이기적이게도, 내가 자리를 비워놓고
그의 빈자리는 오로지 나에 의해서만 충족되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조금은
달라진 모습에 더 조급함을 느꼈는지도 모르고.
출국일을 목전에 앞두고, 나의 얼마 되지 않지만 소중한 친구들은 나의 안녕과 창창한 미래를 빌어줬다.
잘 갔다오라고, 다 하고 오라고. 많은 축하와 선물도 받고. 영국에서의 내가 있다고 생각했던 내 인복은
아마 한국에서 이미 있던 인복이 이어져왔던건지도.
엄마와도 엄마 회사가 끝나자마자 항상 남양주쪽이나 경치 좋은 식당으로 가서 데이트도 했다.
하지만 가을이와 같이 산책도 하고. 폰으로 고스톱하고 있는 엄마 옆에 누워 엄마랑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 하던 그 평범하고도 다정한 일상들과 이제 잠시 떨어져야 했다.
점점, 이게 맞는건가 싶었다. 발렌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엄마와,가을이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결혼식 전에 신부들이 잠깐 회의감을 느낀다고 하던데, 그런 비슷한 거 였을까? 막상 가게 되니 모든 것이
아쉬워지고 불안한.
그 시기에 발렌틴은 '빨리 와, 널 기다리고 있어.', '너무 기대된다. 이제 드디어 너가 다시 오는구나.' 라며
애정이 가득 담긴 메시지를 보내곤 했지만 출국일에 가까워졌을 때에 나는 심드렁해져 있었다.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난 지금 내 앞에 있는 엄마, 가족, 친구들이 더 중요했고 괜히 가는 거 같고.
그리고 드디어 출국날.
엄마는 울지 않았다. 항상 내가 알던 그 씩씩한 엄마처럼, 잘 갔다오라고. 쓸데 없는 짓 하지 말고 건강하게. 라는 보통 엄마들의 그 잔소리를 남기며 손을 훠이훠이 흔들었다.
물론 난 게이트 뒤에서 또 엉엉-하고 울었지만.
퉁퉁 부은 눈으로 엄마와 카톡 하는데 발렌틴이 '비행기 이제 곧 타지? 빨리 와!' 라며 카톡을 여러 차례
보내 놓은 걸 확인한 순간, 정말 그 순간.
나 얘랑 헤어질 거 같다. 라는 생각을 했다.
드라마나 소설, 영화에서든 이런 느낌이 주인공들에게 오는 순간 있지 않은가. 난 그런 순간들을 믿지 않았고
지금도 믿냐 믿지 않느냐 하면 믿지 않는 쪽이다. 결혼 할 사람은 느낌이 온다고 하는것도 그렇게 믿고 싶었던
그들에게 그 사랑의 결실이 이 사람은 결혼 할 사람이다 라는 예감으로 비춰지는 것은 아닐런지
라고 생각할 만큼 회의적이지만 헤어질 거 같다는 그 촉은 정말 희한하게 나에게 갑자기 딱 하고 꽃혔다.
아무 이유 없었다. 그냥, 아주 갑자기 우리 둘 사이는 아마 곧 마지막일 거라는 희한하고도 불길한 예감.
내 예감도 내가 위에서 말한 것 처럼 이미 발렌틴이 공항에서 울지 않았을 때부터 시작됐던 내 촉들의 축적이
이 기분 나쁜 예감으로 수렴된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렴이고 뭐고 다 됐고, 어쨌건 난 그걸 느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을 해소 하기 위해 우습게도 난 그에게 괜히 심술을 부린다.
내가 이렇게 튕겨나가는데도 넌 나한테 사랑을 줄거야? 를 시험해보자는 어리석은 술수였는데 또 한편으로
그때의 내가 안쓰럽기도 하다. 뭐가 그리 날 불안하게 했길래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어서.
발렌틴은 물론 화를 냈지만 꾹꾹 참는게 보였다. 난 나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 한국 음식 먹고 싶어.
라며 별별 심술도 다 부리고 곤란한 부탁을 엄청 해댔지만 발렌틴은 화를 내는 것도 잠시 결국엔 다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준비를 해놨었다.
공항에서 만난 그의 웃음에는 행복감이 가득했지만 난 무심한 태도로 그의 애정 어린 행동에 대응했다.
포옹을 나누지 않고 포옹을 받았고, 사랑을 주지 않고 사랑을 받았다.
아마도 내 촉을 무의식적으로 믿고 밀어내고 있었던 걸까, 아님 그렇게라도 해서 그의 애정을 끊임없이
확인하려고 했던 안쓰러운 내 발악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