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이런 시간이 필요했던걸까?
오랜만에 도착한 한국은 코로나의 여파로 다소 딱딱하고 경직된 분위기인듯 보였지만 영국에서
벗어났다는 것 만으로 난 이미 해방감을 느꼈다. 부모님께선 인도에 계셔서 첫 한달 반 정도를 같이
못 보냈지만 일단 영국에서 느끼고 있던 여러가지 스트레스들, 고민들이 당장 내 눈앞에 보이지 않아
마음에서 멀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다시 내 멘탈은 회복이 조금씩 되가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날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당장 내 곁에 있다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꽤 커서 영국에서도
많은 감정적 보살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에서 오는 행복은
날 기대 이상으로 위로해줬다. 자존감의 원천은 사람마다 여러가지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연료 역할을 하는데 내 가족, 친구가 살고 있는 한국은 커다란 엔진이
되어 끽끽거리고 있던 날 다시 원활하게 움직이게 해주었다.
가장 힘들었던 나 혼자만 남겨진것 같다는 그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영국에선 퀄리티나 가격면에서나 믿을 것이 못된다고 생각해 하지 않던 네일도 하고 머리 스타일도
바꾸니 살 맛이 슬슬 났다. 역시 이런 면에선 한국만큼 좋은 나라가 없다고 생각이 다시 한번 또 들었다.
물론 가슴 한켠에 발렌틴의 존재가 콕 박혀 있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제 내 남자친구가 아니었던
그를 그리워 하진 않았다. 만약 내가 런던을 아예 떠나서 한국으로 정착하러 다시 온거라면 또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정해지지 않았을 뿐이지 언젠가 다시 갈 런던이고 한번은 봐야 한단 걸 알아서 그런지
영국에서 떠나기 전에 느꼈던 그를 향한 애틋함은 온데간데 없어진 듯 했다.
근데 그래도 나 잘 살고 있다고는 보여주고 싶었다. 어쨌건 한국에 있는 동안 아예 개인적으로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도 있고 영국에서 매일 일만 하면서 지쳤던 내 모습만 봐왔던 그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이상한 오기 같은 것도 발동해서 인스타그램에 스토리를 올릴때마다 그가 봤는지
안봤는지 체크 하곤 했다. 물론 스토리를 보고 나서 나에게 따로 DM이 온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꼬박꼬박 내 스토리를 그가 본다는 것을 알고는 일부러 더 사진 고르는데 신경 쓰기도 했다. 그도 그럴게,
날 항상 예쁘다고 해줬던 그였는데 이제 날 너무 오래 봐서 나에 대한 새로움이 사라진것 같은게 서운했고 또
우리가 헤어진게 아깝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그게 뭔 소용이냐 할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때의 난 영국에 있을 발렌틴이 내가 뭘 하는지
어떻게 사는지 미치도록 궁금해 하길 원했고 스토리는 그 미끼 역할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아쉽게도(?)
미끼를 물지는 않았지만. 내가 잘 지내는 모습을 보고 걔가 다시 만나자고 말하길 원했던건 정말 아니다.
어차피 이 관계는 이미 여려차례 실패를 겪었기 때문에 회복 불능인 상태란걸 실감하고 있으면서도 난 계속
그에게 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그 느낌의 해소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건 그가 자발적으로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그게 내가 다시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았던 한국 생활이었지만 슬슬 조급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졸업 비자도 받았고
어떤 이유로 석사비자를 따기로 했는지 상관없이 어쨌건 난 석사를 성공적으로 졸업했었단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영국 정부에서 이렇게 냉큼 2년이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하는데 이미 난 한국에서
멘탈이 무너졌다는 이유만으로 3개월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으니 이젠 다시 무언가를 해야 했다.
사실 다시 돌아가면 집 구하는 것부터 해서 취업 준비며 머리 아픈 일들이 잔뜩 산적해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회피성 도피를 3개월간 한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내 삶을 살아가야 할 문제는 피한다고
누가 해결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2022년 여름 6월, 영국행 비행기를 끊었다.
어찌저찌 임시 숙소를 구하니 지금까지 간신히 그의 존재를 애써 부정해왔던 의지가 조금씩 흐릿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시 한국이라는 내 comfort zone 을 떠난다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다시 한번 그 두려움에맞서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대신 나한테 있어서 가장 큰 품인 발렌틴에게로 또 눈길을 돌렸다.
생각해보면 워킹홀리데이의 처음 단 두달만이 내가 유일하게 타지에서 독립적으로 지냈던 기간일뿐
그 이상의 기간은 항상 발렌틴이란 사람에게 의지해 난 이미 영국에서 자립할 의지나 마땅히 지녀야 할
의연함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에게 조심스레 떠나기 2주 전 혹시 짐이 너무 많아서 그러는데 픽업을 해줄 수 있겠냐고 연락했다.
사실 이것도 핑계였지. 영국에서 3년정도 산 나에게 우버를 타고 임시 숙소로 가는 일을 하는 것쯤은
껌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중이 궁금했다.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걔가 나를 아는 것만큼이나 나도 걔를
파악하고 있었고 그의 반응에 따라 나 없는 3개월 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 지 충분히 가늠이 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곧바로 답장이 왔고, 잘 지냈냐는 간단한 안부 인사후에 차를 렌트해서 나를 픽업하러 오겠다고 했다.
이미 그의 말투에서 난 알 수 있었다. 얘도 날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고.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게 그의 마음에 어느 정도 확신이 들자 안도감이 파도처럼 훅-하고 밀려와 나를 덮쳤고
난 그 파도같은 감정에 감사하게 휩쓸려갔다.
드디어 3개월 간의 한국 생활을 마치고 다시 영국으로 가는 날.
우리 엄마는 한국에서 참 누구를 많이도 떠나보냈다. 나도 영국에 보내, 우리 아빠도 인도에 보내.
공항에서 작별인사하는게 도가 텄을 만큼 보통 이상의 횟수로 나와 아빠를 보냈지만 이별은 그 기간에
상관없이 절대 익숙해 질 수 없는 것의 카테고리에 고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 엄마에게도 이별은
그러한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 엄마는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다. 난 이제서야 조금씩, 물론 아주 조금이지만 부모님의 마음도 이해해 볼 수 있는 정도의 철이 들어가고 있었다고 치면 우리 엄마는 말 그대로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고 엄마에게서 볼 수 있었던 그 알 수 없는 단단함 또한 엄마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라는 걸 이제서야
난 서서히 느껴가고 있었다.
서로 오글거리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나와 엄마는 그 전날부터 '아 진짜, 우는 그런 이상한 거 하지 말자?' 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넘겼고 나 또한 전혀 울 마음이 없었는데,
막상 다시 엄마를 떠나야 할 날이 되자 울렁울렁 거리는 마음은 피할 길이 없었다.
짐까지 다 부치고,
같이 이른 점심도 먹고,
이제 나 들어가면 되는데,
삐죽삐죽 눈치없이 흐르려는 눈물을 죽기살기로 참으며 주먹을 꽉 쥐고 게이트 앞에 서서
'엄마 이제 나 들어간다?' 라고 엄마에게로 고개를 돌리던 그 순간이 마치 슬로우모션 효과를 건 것 마냥
아직도 선명하게 내 기억에 박혀있다.
엄마에게 고개를 돌리던 그 1초도 안되는 그 시간 안에, 엄마의 얼굴이 내 눈에 담기기도 전에
'아 엄마가 울고 있구나' 란 직감이 들었고 역시나 내 눈이 엄마의 얼굴에 닿았을 때 우리 엄마는
울고 있었다. '어차피 볼건데 뭐하러 울어' 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던, 누구보다 용감하게 나를 보내던
우리 엄마가 우는 걸 보는데 그걸 참을 수 있는 딸이 몇 되겠는가.
그렇게 신파극 찍지 말자고 다짐했던 우리 둘은 그 누구보다 더한 신파극을 찍었다.
물론 꺽꺽 하면서 운건 아니지만 엄마의 눈물은 나에게 컸다. 엄마도 떠나는 사람 걱정 안 시키려고
단단한 척 엄청 노력하고 있었던거구나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서 혼났다. 하필이면 동생이 같이 못 와서
다시 서울로 혼자 돌아가는 엄마를 보고 있자니 착잡한 마음이 쉬이 가시지 않았고 동생에게 엄마 잘
챙겨드리라고 어찌나 신신당부를 했는지. 아- 엄마 보고 싶다 이렇게 쓰고 있으니.
여튼, 다시 돌아와서 긴 비행을 마치고 드디어 도착한 히드로 공항. 하지만 히드로 공항은 이때쯤 부터
해서 공항에서의 짐과의 전쟁이 시작되었었던 시기였는데 짐을 찾는 게 어찌나 오래 걸리던지.
발렌틴은 이미 게이트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고 있다는 문자를 보냈고 날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누군가가 그 라는 것에서 부터 이미 너무 설레서 어쩔 수 없었는데 짐이 어찌나 안나오던지,
물론 짐 찾기를 통해 지연되는 시간은 어떤 면에선 기다렸던 사람과의 재회를 더 극적으로 만들어주기도 하는
장치가 되기도 하지만 1시간은 솔직히 너무했잖아.
50분 정도가 되고 나니 발렌틴을 본다는 설렘보다 날 기다려야만 하는 그에게 느끼는 미안함과 짐을 1시간
가량 기다려 짜증스런 온갖 마음이 다 겹쳐졌다.
드디어 내 짐이 나오고 급히 문을 열고 나간 그 곳에는
익숙한 얼굴의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딱 3개월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