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안리에서 시작된 이름
1993년 1월의 부산, 바닷바람이 매섭게 불던 겨울이었다. 스무 살의 나는 광안리 해수욕장 앞에 있는 펍 레스토랑 W.H.O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오전 10시에 출근해 밤 9시에 퇴근하는 긴 하루. 손님이 적은 오전이면, 테이블마다 냅킨을 채워 넣거나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이 내 몫이었다.
그날도 변함없이 레스토랑 스피커에서는 이승철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빨간 넥타이~ 줄무늬 팬티~ 그것만이 전부는 아냐~~”
익숙한 노랫말이 레스토랑 구석구석을 메우고 있을 즈음, 스무 살 언저리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들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음료를 시킨 뒤, 눈부신 겨울 햇살에 잠긴 광안리 바다를 한참 바라보았다.
아르바이트 교육 중에는 늘 물주전자를 들고 홀을 돌아야 했다. 물잔에 물이 반쯤 비어 있으면 새로 채워 넣으라는 지시도 있었다. 그들의 테이블 앞에서도 주전자를 기울이는 순간, 한 남자가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제 물 더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낯설고도 정갈한 서울말이었다. 그 말투 하나가, 부산 사투리 속에서만 자라온 나의 귀에 오래 맴돌았다. 순간 어딘가 멋쩍어 주전자를 바로 세우고 자리를 피하려 하자, 그가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여기서 일하시는 거예요?”
지금 같으면 사적인 질문이라며 피했겠지만, 그 시절엔 이름을 묻고 답하는 일이 그저 자연스럽고도 예의에 맞는 일처럼 여겨졌다.
“아… 이름은 좀 촌스러운데예. 김철옥인데예. 대학생인데 방학이라 알바하는 기라예.”
내 대답에 그는 잠시 웃음을 머금었다.
“이름 너무 예쁜데요. 대학생인데 이렇게 성실하게 아르바이트까지 하시다니, 참 착하시네요.”
짧은 말 몇 마디였지만, 그 순간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머물렀다. 꿀이 묻은 듯 부드러운 서울말은 낯선 설렘을 일으켰고, 나는 그저 뒷걸음치며 테이블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다시 홀을 돌던 중 그가 놓인 메모지를 가리켰다.
“이름이 이게 맞나요?”
거기엔
김설옥 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철인데예, 설이 아니고… 김.철.옥입니더.”
그들은 그렇게 내 이름이 적힌 메모지를 챙겨 들고 계산을 마친 뒤 레스토랑을 나섰다.
오후 네 시 무렵, 카운터에 있던 선아(가명) 언니가 전화를 받더니 나를 불렀다.
“철옥아, 네 찾는다. 전화 좀 받아라.”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자, 낮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오전에 레스토랑에 갔던 사람인데 기억하시나요? 제 이름은 김지성(가명)입니다. 한양대 경영학과 2학년 휴학 중이에요. 철옥 씨와 꼭 연락하고 싶어서… 무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퇴근 후에는 몇 시쯤 집에 계세요? 그때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번호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짧은 순간, 내 일상은 바닷바람처럼 흔들렸다.
그리고 나는, 그 겨울 바다의 빛과 함께 오래 기억될 첫사랑의 문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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