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박스
전화통화로 9개월 정도 애정세포의 결정적 시기를 유지할 즈음 그가 만나자고 하였다.
“아버지 사업이 거의 부도직전이라 가족들 모두 급히 제주도 친척집 쪽으로 가서 당분간 있을 예정이야. 가기전에 너를 꼭 보고 가고 싶어. 토요일날 3시즈음 볼 수 있겠어?”
“쌉가능이지!!!”
라고 본능적 말을 바로 내뱉으면 내가 너무 격하되기에 속으로만 말하고 정상적으로 약속장소와 시간등을 서로 정하면서 공식 첫만남을 앞두었다.
심장비트박스가 요동을 친다. 심장에
비
비상등켜졌고 추억
트
트렁크 활짝 열리고
밖
밖으로 계속 되내어보는 스스윗한 언어들로 9개월을 함께 했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수화기 너머 음성으로만 주고 받았기에 서로의 존재를 현실보다는 상상이 상시옵션이 된 환상으로 연결되어 있어 실제로 만나면 환상이 깨어져 실망을 할 수도 있겠다라는 염려는 뿌리칠 수 없었다. 어색할 것 같았다. 그래도 그를 만나러 가는 동부여객 버스는 신데렐라 태워가는 호박마차같았고 버스 창가로 보이는 10월의 뭉게구름은 세상 가장 달콤하고 푹신한 솜사탕같았다. 가을햇살 가득 묻은 가을바람이 나의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순간, 난 ‘지금 만나러 갑니다’영화의 여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송골매의 ‘모두 다 사랑하리’노래는 이런 경우에 만들어졌겠구나 싶었다.
타오르는 태양도 오~ 날아가는 저 새도 오~~ 다 모두다 사랑하리~
모든 환상동화, 노래가사, 영화제목들을 번갈아가며 상상 릴레이를 하다보니 이제 그를 만나는 시간이 다 되었다. 약속한 큰 건물 앞에서 서로 마주 섰다. 어제도 만나고 헤어지고 오늘 만난 느낌이다. 우려한 어색함은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 전화할 때보다 더 편안한 느낌.
‘이 남자랑 정말 결혼해야 겠다. 운명같은 존재라는 걸 이제 내가 강하게 느꼈어...’
그의 손에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작은 책자를 쥐고 있었다. 내가 쳐다보니 “그냥 간간히 읽기가 좋아. 조금전에 너 기다리면서 읽었던 글은 하루종일 마늘을 까는 할머니이야기였는데 그렇게 고생해서 손끝이 닳을 정도로 마늘을 까는데도 겨우 오천원밖에 못 받는대. 마음이 참 아파. 내가 큰 돈은 벌지 못하더라도 결혼해서 생활비에서 한 달에 저렇게 어려운 할머니 조금 도와드릴 수 있는 형편을 유지하고 싶어”라고 자연스럽게 이야기 해 주었다. 이제껏 대화를 이런식으로 해 주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가족도 주변사람들도. 도와주겠다는 마음이 없었다는게 아니라 이야기의 맥락에 사실과 바램과 따뜻함이 녹아 있는 그만의 언어는 참 특별함 그 자체였다. 까페에서 2시간 정도 속삭임, 미소, 약속, 눈빛 등을 주고 받았고 나란히 앉아 손을 잡으니 더 특별히 연결이 되었다. 그와 나의 체온이 연결되고 손에도 심장이 있는 듯
비트박스
비트박스 요동치는 느낌이 연결되었다. 제주도로 떠날 준비와 정리해야 할 일이 많은 그와 2시간 만남도 과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았다. 만남의 횟수와 시간이 중요하지 않음을 서로 동의했었고 이 순간 이후 인생을 함께 할 사람이 서로라는 것도 동의하며 헤어졌다.
그 다음날이 제주도로 가는 날이다. 잘 갔으려나 생각하고 생각했다.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갔다. 연락이 오지 않는다. 공식 첫만남에서 결국 내가 마음에 안들었지만 속내를 숨기고 성품이 좋아 그냥 예의를 갖춰 애정이 있는 척 한 건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많이 한 생각은 공식 첫만남 2시간동안 주고 받은 말과 눈빛, 움직임 등 하나도 빠짐없이 떠올리고 생각하고 또 떠올리고 생각하는 것을 무한 반복하는 거다. 무한반복인데 지겹지가 않다. 무한반복 떠올림을 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의 연락은 없다. 걱정되고 연락을 기다린다는 말을 나의 일기장에 썼다. 그가 있는 곳의 주소도 모르고 전화번호도 모르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일기장에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것과 함께 한 2시간의 모든 것을 무한 반복 생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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