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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Mar 03. 2023

이순신의 학익진과 지족해협 죽방렴

충무공을 만나고 온 남해여행 (2023.02.24.)


 

 경상남도 남해군(남해섬) 삼동면에는 독일마을이 있다. 

1960~70년대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와 광부들이 현지인과 가정을 이룬 뒤 고국에 돌아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룬 곳이다. 독일마을에서 내려다보면 남해도와 창선도 사이의 좁은 해로가 보인다. 지족해협이다. 해로가 좁아서 조수의 유속이 빠르다. 시속 13-15km의 거센 물살이 지나다닌다. 이곳에서는 좁은 바다의 물목에 대나무로 만든 그물을 세워서 물고기를 잡았다. 물때를 이용하여 고기가 안으로 들어오면 가두었다가 필요한 만큼 건지는 재래식 어항으로 이곳에서 잡힌 생선은 최고의 횟감으로 손꼽히고 있다. 물살이 빠른 바다에 사는 고기는 탄력성이 높아 찰지고 그 맛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물이 들고나는 환경을 이용해서 살이 찰진 멸치를 잡기위해 죽방렴이라는 그물을 쓰는데 그 모양이 학이 펼친 날개모양을 꼭 닮았다. 그 지역의 어부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학익진을 펼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학익진을 펼친 전쟁터 한산도 앞바다와 남해섬 지족해협은 지척간이다. 

직선거리로 46km정도이고 1492년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수군의 판옥선으로도 하루면 닿을 거리이다. 물론 노젓는 격군들 입에는 단내가 나겠지만...  여수에 본부를 둔 전라좌수영에서도 지족해협은 지척간이다. 지리적으로 볼 때 지족해협은 한산도와 여수의 정중간에 위치해있다.


 여수는 전라좌수영이 있던 곳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한 해전인 1491년 2월 13일에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정삼품)로 부임했다. 좌수사는 해역사령관으로서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순신이 부임하던 무렵 전라좌수영은 순천, 광양, 낙안, 보성, 흥양 등 다섯 개의 내륙 기지와 방답, 여도, 사도, 발포, 녹도 등 다섯 개의 해안 기지를 지휘했다. 이때 장군은 47세였다. 32세 되던 1576년 2월에 식년무과 병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에서 육군 국경경비대 근무를 시작으로 파직과 복직을 거듭하는 등 인사적 갈등을 겪게 된다. 강직한 성품과 원칙을 중요시하는 자세로 초지일관하니 주변에는 장군을 배척하고 시샘하는 무리들이 득실했던 탓이다. 15년만에 드디어 해군사령관으로서 동아시아 역사의 최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좌수영에서 수시로 지휘 관할지역으로 순시를 하던 장군께서는 남해도와 창선도 사이의 지족해협을 자주 지나다니며 해협의 빠른 물살을 이용한 죽방렴 멸치잡이 방식을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시달려오던 백성들에게는 원칙을 중요시하고 논공행상이 분명하고 일벌백계가 추상같았던 이순신 장군의 위엄에서 나오는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존경하는 장군에게 찰진 멸치회와 젓갈을 대접한 어민도 숱하게 많았을 것이다. 지족포구에서 죽방렴 멸치를 안주로 하여 술을 드시며 지역 수령들과 어민들과 죽방렴 어업에 대해 대화도 나누었을 것이다.


 천재와 범인의 차이는 1%의 영감을 호르몬 삼아 나머지 99%를 좌지우지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라 했다. 이순신 장군의 승전은 전쟁에 대비한 철저한 훈련의 결과이며 남서해의 섬과 조수를 천재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능력에서 나온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한산대첩의 전과는 죽방렴이 준 영감 1%에서 나온 학익진 진법 전술 구사의 결과가 아닐까? 가설로 끝날 수 있는 가설을 세워본다.


 잔잔한 한산섬 앞바다를 피해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거제도의 견내량에 주둔해 있었다.

왜장 와키자카는 용인근처 광교산전투에서 기습선제공격으로 조선군을 대파한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잔잔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이번 수전에서도 그렇게 할 계획이었다. 조선에 상륙해서 승승장구 북상하며, 본국의 주군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조선반도는 거의 관백합하의 휘하에 들었사오니, 청컨대 곧 명나라로 진군할 채비를 하시라" 호언장담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조선 수군이 나타나 바다를 휘젓고 다니며 본국과의 병참선을 끊어버리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순신을 잡고 국왕을 잡으면 이 전쟁은 끝나는 것이라 믿었다. 장기판에서는 궁을 잡아야 게임을 이기게 되는데, 이순신을 잡고 나서 국왕도 잡아버리는 장기판의 '포'장을 자기가 두겠다는 것이었다.


 이순신도 그 순'사즉필생 생즉필사'를 되뇌이고 있었다.

와키자카는 용인 광교산 전투에서 2천명으로 기습선제공격을 감행하여 5만명 조선군을 격파하고 이순신 자신을 잡기 위해 내려온 장수이다. 이순신은 육군이 연전연패하여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주한 판에 수군마저 바다를 내주면 모든 게 끝장이라 생각했다. 견내량은 물길이 좁아 유속이 빠르고 암초가 많아 판옥전선이 싸우기 곤란한 곳이다. 또 형세가 급해지면 왜군은 기슭을 따라 육지로 올라갈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은 한산도 쪽의 넓은 바다로 유인해내어 학익진을 펼쳐 죽방렴 멸치잡듯이 모조리 잡아버리기로 계획을 세웠다.


 양쪽 모두 사생결단의 각오로 임전무퇴할 것이었다.

와키자카는 조선 함대가 자신을 유인해내기 위해 견내량 코앞까지 전진하다가 후퇴하면서 학익진을 짜는 것을 보았다. 순간, 그는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이 기병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나가의 연합군을 측면 급습하여 학익진을 궤멸시켰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 학익진이라! 저런 병략의 기본도 모르는 놈. 학익진은 아군의 숫자가 적군보다 압도적으로 많을 때 쓰는 진형이거늘! 고작 20척으로 70여척인 내 함대를 감싸겠단 말이냐? 게다가 학익진의 생명은 측면이거늘 측면을 비워두고 학익진을 펼치겠다는 겐가?" 비웃음이 나왔다.


 "수세 속에 공세가 살아있고 공세속에 수세가 살아있어야 한다."

세상만사 승패는 기회포착에 달려있다. 공격할 때와 방어할 때를 적기에 수시로 전환할 수 있어야 이길 수 있다. '타이밍'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의 소규모 함대만으로 작은 반월형 포위진을 짜서 와키자카를 방심하게 하고서 매복해있던 전라우수영, 경상우수영의 함대가 양쪽에서 들이쳐 전라좌수영 함대와 학익진을 펼쳐 적을 포위해 적의 측면까지 완전히 감싼다는 계획을 세웠다. 수세와 공세가 혼재한 전술이다. '침묵이 최고의 웅변'임이 증명되는 순간이 될 것이다.


 죽방렴은 설치되었고 이제 조수는 멸치를 몰아올 것이다. 하늘은 우리 편이다.

조수에 밀려오는 멸치는 죽방렴 안으로 쓸려 들어간다. 멸치는 갇히게 될 바로 앞의 운명을  알지 못한다.  막힌 곳에 이르러서는 계속 나아가고자 하지만 갈 수 없고  되돌아가자니 조수가 밀려온다. 와키자카의 군선들은 멸치 떼처럼 어린진(물고기 비늘 모양의 진)의 형세로  죽방렴, 학의 날개를 찢으러 들어온다. 찢기고 부러진 날개로는 날지못할 것이니 조선의 바다도 이제는 자신의 것이라 믿고 싶었다.  자신은 이제 명으로 들어가는 길을 여는 일등공신이 되는 것이다. 와키자카는 목이 터져라 "도쯔게키(突擊)"를 외치며 진군 명령을 내렸다.


돌격전함 거북선이  등장하다.

거북선은 왜군선을 들이박고 불을 뿜으며 몰이 개처럼 왜군선들을 학의 날개 안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와중에 와키자카는 조선 수군이 1차 포격이 끝낸 뒤 포를 재장전하는 틈을 이용하여 신속히 돌파하여 학익진의 날개를 찢는 반격을 시도하고자한다.


아뿔싸~~

와카자카는 제자리 회전이 가능한 판옥선의 특징과 혹독한 훈련을 통하여 조선 수군의 숙달된 2차 포격이 곧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놓쳐버렸다. 아연했다.  단 하나를 놓쳐도 그 하나가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찌르는 게 전쟁터이다. 수세 속에 공세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1차포격이 끝나자마자 이순신 장군의 명에 따라 붉은 기가 오르고 판옥선들은 일제히 선회 기동을 함과 동시에 불을 뿜었다.


양수겸장(兩手兼將)

현대전에서와 같은 통신장비가 없는 상태에서는 강도높은 철저한 훈련 없이는 학익진 지휘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또 부하 장병들이 지휘관의 명에 죽고 살기를 각오하지 않고는 펼칠 수 없는 전술이다. 학익진은 좌익 우익  양날개가 기동력파괴력을 가져야 하고, 중앙적의 돌진에 맞서  밀리지 않는 강한 저지력을 가져가능하다. 그런데도 숫적으로 열세한 형편임에도 철저한 준비와 치밀한 전술과 휘하 장병들의 충성심을 끌어내고 높은 사기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대승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순신은 여건과 상황에 맞는 전술로 '포장!', 군신다운 용병술로 '차장!'을 부른 양수겸장의 한산대첩 명장이시다. 구국의 군신이셨다.


 격침되거나 나포된 일본 함선은 모두 총 59척이었고, 한산도로 도망친 와키자카 휘하의 병력 400여 명은 군량이 없어 13일간 미역을 먹으며 견내량과 무인도에서 머무르다가 뗏목으로 겨우 탈출하였다. 와카자카 야스하루는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 군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했다. 한산대전으로 이순신은 일본의 조선정벌 책략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초봄의 낙조 속에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는 죽방렴

500 여년전의 그곳에서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무심할 뿐

그 옛날처럼 밀려오고 밀려나는 해협의 물살에 은빛 멸치떼만 찰진 살이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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