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산을 보며
"어느 계절을 좋아하세요?"
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잠시 머뭇댄다.
짧은 봄날의 바람도 좋고,
무더운 여름날의 소나기도 좋고,
가을날의 억새도 좋고,
겨울에 눈을 기다리는 그 마음도 좋다.
그래도 눈만 온다고 하면 얼굴에 환하게 웃음꽃이 피는 걸 보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분명 겨울인게다.
지난 일요일에 친정을 다녀오면서 모처럼 국도로 길을 잡았다.
보통은 저녁 늦게 올라오기에 막히지 않는 고속도로를 이용한다.
그런데 이날은 저녁에 책 출간을 위한 줌 모임이 있어서 좀 일찍 출발했더니 딱 고속도로가 막히는 시간이어서 고민 없이 왼쪽으로 핸들을 돌려 국도로 접어들었다.
속리산 자락 어디쯤을 지나다 앞쪽에 보이는 산을 보면서 지난겨울 이곳을 지났던 생각이 났다.
메마른 겨울 산.
눈조차 내리지 않는 텅 빈 겨울 산.
이 겨울 산을 보면서 난 '아, 참 아름답다!'라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내가 좋아하는 겨울은
하얀 눈이 내리는 모습이나 온 세상이 눈의 순수함으로 하얗게 덮인 세상이었다.
그 아름다움 때문에 눈길의 미끄러움과 지저분함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세상은 온통 눈으로 덮이고, 나뭇가지에도 눈이 쌓이고,
까치밥 한두 개가 눈 속에 얼어서 흰색과 주황색으로 아름다운 풍경.
그 위로 펼쳐진 겨울 하늘은 또 얼마나 쨍하게 파르라니 아름다운가.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눈사람, 눈오리, 눈토끼 등은 또 나를 미소 짓게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겨울은 이런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난겨울 얇은 눈 이불 한 자락 덮지 못한 그 산을 보면서
난 연두연두한 봄날을 떠올렸고,
짙푸른 녹음을 떠올렸고,
도토리 영글어 가는 가을을 떠올렸다.
그 텅 빈 산은 이 모든 것을 다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모든 것을 다 떨구어 냈기에
다시금 봄을, 여름을, 가을을 맞이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하얀 눈이 펑펑 내려서 소복이 쌓이는 겨울을 좋아한다.
순식간에 내가 어린아이가 되고, 소녀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그 텅 빈 겨울 산이 감추고 있는 것들을.
겨울, 그 비움의 아름다움을 안다.
요즘의 50대는 중년이 아니라 청년이라 한다.
그래. 나를 봐도 2~30대 때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살고 있으니 맞는 말이이라.
하지만 간혹 겨울 산처럼 나를 비워야겠다.
그 비워둔 곳에 새로운 것이 들어올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