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처럼 골라 읽어보렴', 엄마의 작은 실험

테이블 위에 펼치다

by 작가의식탁 이효진

요즘 아이는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붙들고 산다. 새벽에도 몰래 영상을 보고, 짧은 영상에만 집중한다. 영상은 짧고 빠르다. 자극적인 화면은 아이의 집중력을 붙잡지만, 대신 사고력은 점점 짧아진다. 나 역시 그런 현실 앞에서 수없이 잔소리를 했다.


"이제 그만 봐."

"책 좀 읽어라."


그럴 때마다 아이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읽을 책이 없어."


그 말이 처음엔 핑계로만 들렸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은 몇 차례의 이사를 거치며 대부분의 책을 정리해버렸다. 아이 어릴 적 함께 읽던 그림책, 초등 저학년 때 좋아하던 동화책, 누군가의 마음이 담긴 선물 책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까지. 그 모든 책이 어느새 우리곁에서 사라졌다. 결국 남은 건 빈 책장과 스마트폰뿐이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책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책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책과 만날 기회가 사라졌다'는 의미라는 걸.


다행히 우리 동네에는 도서관이 참 많다. 집 바로 근처에도 있고 걸어서 15분 거리에도 있다. 도서관들이 깔끔하고 아이 친화적으로 꾸며져 있어서 자주 들르게 된다. 예전에는 주말마다 아이 손을 잡고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에 가는 날이면 그건 우리 가족의 작은 축제였다. 책을 빌리고 나서 맛있는 밥을 먹거나, 아이가 좋아하는 핫도그를 사주기도 했다. 책과 외식이 한 세트였던 셈이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 고학년이 되고, 사춘기가 찾아오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엄마랑은 안 갈래."

"귀찮아."


이제는 도서관 가자는 말 자체가 잔소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전략을 바꾸었다.


"좋아, 그럼 엄마 혼자 갈게."


그때부터 나의 작은 실험이 시작됐다. 혼자 도서관에 가서 책을 고른다. 아이의 취향을 떠올리며 표지와 제목을 꼼꼼히 살핀다. 그렇게 열 권 남짓한 책을 빌려온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거실의 큰 테이블 위에 그 책들을 펼쳐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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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에 책을 펼쳤다우리 집 거실에는 TV 앞에 커다란 테이블이 있다. 그 위에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표지가 보이게 쫙 펼쳐둔다. 책을 세워 꽂지 않고 눕혀놓는 이유는 단 하나다. 아이 눈에 ‘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 이효진


우리 집 거실에는 TV 앞에 커다란 테이블이 있다. 그 위에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표지가 보이게 쫙 펼쳐둔다. 책을 세워 꽂지 않고 눕혀놓는 이유는 단 하나다. 아이 눈에 '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책장에 꽂힌 책은 제목만 보인다. 제목만 보고는 어떤 이야기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니 손이 잘 가지 않는다. 하지만 테이블 위에 펼쳐놓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책 표지의 색감, 그림, 제목, 두께, 느낌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이 마치 TV 리모컨 같다. 어느 채널을 고를까 리모컨을 누르듯이, 어떤 책을 펼칠까 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신기하게도 이 실험은 효과가 있었다. "읽을 책이 없어"라고 말하던 아이가 어느 날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럼 여기서 골라봐."


내 말에 아이는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페이지를 넘겼다. 그 모습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뿌듯했다. 그 후로 아이는 독서록 숙제가 있을 때면 거실 테이블로 와서 책을 고른다.


"독서록 써야 하는데 뭐 읽지?"


그럴 때면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는다. 테이블을 가리키면 된다. 아이의 손이 천천히 책 위를 스친다. 그리고 결국 한 권이 열린다. 그 작은 선택의 순간이 엄마로서는 가장 기쁜 순간이다.


디지털에 길들여진 아이에게 꼭 필요한 건, 바로 이런 종이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스마트폰 세대 아이일수록 책과 친해질 수 있는 '눈에 보이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


요즘 세상에서 책을 읽는다는 건, 단지 지식을 얻는 행위가 아니라 속도를 늦추는 연습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세상은 빠르다. 영상은 1분도 채 되지 않고, 정보는 손가락 하나로 넘긴다. 그러나 책은 다르다. 한 페이지를 읽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눈과 손과 마음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그 느린 시간이 아이에게 필요한 시간이다.


나는 아이에게 '읽어라'라고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보이게' 만들어주기로 했다. 책이 눈에 보이면 마음도 조금은 움직인다. 읽지 않더라도, 테이블 위에 놓인 책들은 집안의 공기를 바꾼다. 그건 스마트폰 화면이 줄 수 없는 아날로그의 온기다.


물론 아이가 매번 책을 집어 드는 건 아니다. 어떤 날은 테이블 앞을 힐끗 보기만 하고 지나간다. 하지만 괜찮다. 책은 조용히 기다리는 법을 아는 존재니까.


나는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은 도서관에 간다. 혼자지만,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마음으로. 책을 고르고, 대여 가방에 담고, 거실 테이블에 펼쳐둔다. 그게 요즘 나의 일상이고, 엄마로서의 작은 실험이다.


언젠가 아이가 스마트폰 대신 책을 들고 '이거 재밌다' 한마디만 해준다면, 그걸로 이 실험은 충분히 성공한 셈 아닐까.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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