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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Apr 30. 2024

문장 속에서 어우러지는 단어들

017.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나의 참모습을 제대로 소화했는지, 그래서 문장을 쓸 때 그것이 고요함으로 드러나는지가 중요하다. 여기서 고요함이란 심장이나 머리가 일치하지 않는, 그래서 삐걱거리고 불안해 보이는 단어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잘 만들어진 채소수프 속의 양파는 다른 채소들보다 자신이 더 주목받기 위해 고개를 내밀고 "내가 양파야, 내가 양파라고!" 하며 외치지 않는다. 대신 다른 양파들과 함께 그 수프가 좋은 맛을 내도록 헌신한다. ☞ 본 책, 45쪽

글을 쓰다 보면 내가 쓴 글이 얼마나 잘 읽히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비록 최초의 독자이기도 하면서 최후의 독자가 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온라인 공간에서 글을 쓴다는 건 분명, 누군가가 제 글을 읽을지도 모른다는 전제 하에 쓰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다고 한다면 함부로 쓸 수 없는 게 글이긴 합니다. 속된 말로 '글은 나의 얼굴'이라는 단순한 사실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그 어떤 글도 쓸 수 없게 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글이라는 것은 쓰기 시작했다면, 어떻게든 완결을 보아야 하고, 완결했다면 제 손을 떠나 누군가에게 노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걸 원하지 않거나 그것이 싫다면 개인 일기장에 글을 쓰면 되지, 굳이 이런 공간에 글을 쓸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갖은 유혹과 비난-이 비난은 주로 제 내부에서 들려옵니다. 그 소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반면 유독 글을 쓰고 있는 제 귀에만 또렷이 들리곤 합니다.-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글을 완성합니다. 관련된 단어를 매칭시키고 용기를 내어 발행합니다. 이미 발행해 버렸으면 그 글이 잘 쓴 것이건 그렇지 못하건 간에 더는 왈가왈부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경우에 정말 아니다 싶으면 발행을 취소해 버리면 그만일 테지만, 조금이라도 그럴 여지가 있었다면 굳이 발행하는 번거로움과 뻔뻔함을 감수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제가 쓰는 글 속에 과연 몇 개의 단어가 동원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단어들이 문장 속에서 올바른 기능을 하고 있는지, 서로 잘 어울리는지 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퇴고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들 단어들의 기능과 조화를 꾀하는 것에 다름이 아닐 것이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퇴고에 그리 깊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퇴고에 들이는 시간 역시 미미하기 짝이 없는 정도입니다. 누군가는 제게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글을 퇴고도 없이 쓰냐고 말입니다. 저는 퇴고에 들이는 시간이 아까워 한 편의 글을 쓸 때 나름은 최선을 다해서 쓰고 있습니다. 남들이 볼 때에는 설렁설렁 쓰는 것 같아도 문장의 호응 관계나 문장 속에서의 낱말의 어울림 등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쓰고 있습니다. 네가 쓴 글에 그렇게 자신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저로서도 할 말이 없습니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글에 미미한 점이 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저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 오늘도 문장 속에서 삐걱거리고 불안해 보이는 단어가 없는 글을 쓰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 노력이 얼마나, 혹은 어디까지 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모든 것이 충분히 조화를 이뤄 그 어떤 낱말이나 문장도 독자적으로 튀지 않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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