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나에게
삼백 마흔일곱 번째 글: 밤에 떠나는 무의식의 세계
밤에 쓴 편지는 부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옳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실제로 밤에 썼던 편지를 부쳐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냥 썼던 그 밤에 그대로 봉투에 넣어 입구를 봉했다면, 그도 아니면 찜찜한 마음이 들었어도 밀봉된 그 편지를 기어이 꺼내어 아침에 다시 읽어 보지만 않았어도 충분히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왜, 밤에 쓴 편지는 부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지 살아오는 내내 궁금했습니다. 아마도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건 유독 밤에 사람이 더 감수성이 높아지는 탓입니다. 만약 연애편지를 썼다고 가정한다면,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표현도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게 바로 밤이 만들어 내는 우리의 감정선입니다.
태곳적부터 인류는 밤이 되면 위협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그건 세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했어도, 우리 몸속 꽤 깊은 곳에서 유전 인자에 새겨져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위가 훤히 보이는 낮과 달리, 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주시해도 앞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친구인지 적인지조차 분간이 안 가기 마련입니다. 잠시만 방심하면 우리의 안전을 장담하지 못합니다. 촉각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그러고는 주변을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감각이라는 감각은 총동원해야 하고, 낮 동안 흐리멍덩했던 관찰의 레이더를 가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에서든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때가 불과 몇 만 년도 채 안 되었을 겁니다.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그 어둠 속에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방에게서도 우리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분명 의식적인 노력이 뒤따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여건 속에서도 생존하려는 몸부림은 철저히 무의식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의식을 가장한 무의식, 이미 이런 상태가 되면 무의식은 우리를 점령하게 됩니다. 무의식은 자아라는 껍질을 깨고 나왔을 때 비로소 발현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무의식이 낮 동안 저 깊은 곳에 웅크려 있다가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기 시작할 때가 밤입니다. 그중에서도 깊어가는 밤이 아닌가 싶습니다.
종종 우리는 무의식이 주는 억압을 견뎌야 하고, 지극히 동물적인 본성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냉철한 이성으로 무의식을 제압하기도 해야 합니다. 만약 무의식에 철저히 순종하여 말하고 행동한다면 우린 그 어디에서도 발 붙이고 살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는 무의식이 명령하는 대로 붓이 따라가야 하는 과정입니다. 대낮처럼 의식만 또렷해서는 결코 우리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글을 쓸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 우린 과감히 우리 자신의 무의식과 만나야 합니다. 밤은 저에게 저의 무의식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사진 출처: 글 작성자 본인이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