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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작이 Jun 16. 2024

잠옷을 꺼내봐야겠습니다.

025.

지난 겨울, 체크무늬 파자마를 샀다. 지금까지 잠들 때는 목이 늘어난 반소매 티에 파자마 바지를 입고 잤었는데, 새삼스럽게 지난 겨울부터 파자마를 입기로 했다. 오가닉 면으로 된 체크무늬 파자마 두 벌의 효과는 굉장했다. 아무렇게나 입어도 잠만 잘 잤는데, 굳이 파자마가 무슨 소용인가 싶었으나, 파자마를 입으니 잠이 더 잘 오기 시작한다. 피곤해서 쓰러져 자는 것이 아닌 소중한 나를 위한 잠드는 의식에 꼭 필요한 제복이 바로 잠옷이었다. 남에게 보여주는 옷이 아니라 오직 내가 나를 위해 입는 옷. ☞ 본 책, 50쪽

그러고 보니 저자와 저의 잘 때의 차림새가 매우 흡사합니다. 저 역시 대개는 늘어진 반소매 티에 파자마 대용으로 입는 반바지를 입고 잡니다. 그다지 크게 불편함은 못 느끼고 있지만, 막상 인용한 이 대목을 보니 잠옷을 입고 자면 잠이 더 잘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자마, 즉 잠옷은 말 그대로 잘 때 입는 제복, 곧 유니폼인 것입니다. 그냥 편하면 됐지, 무슨 잠옷씩이나 할 수도 있겠으나, 잠옷 특유의 목적을 생각한다면 못 입을 것도 없겠습니다. 과연 잠옷을 입어본 게 언제였을까요?


아마도 갓 결혼한 23년 나름 커플룩이랍시고 잠옷을 1년 정도 입어본 다였던 같습니다.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이후로는 잠옷을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막상 그때는 그렇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매번 무슨 제복을 걸치듯 일일이 갈아입는 게 귀찮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 다시 잠옷이 입고 싶어 질까요? 게다가 버젓이 집에 잠옷을 두고 입지 않았을까요? 그때에 비해 체구가 커져 버려 어쩌면 이젠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문제가 하나 생길 것 같습니다. 잠옷을 꺼내 입었을 때 너무 작아서 입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막상 그런 일이 생겨도 아내에게 몸에 딱 맞는 새 잠옷을 사야겠다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만약 그 얘기를 꺼낸다면 아내는 분명히 그런 말을 할 듯합니다. 멀쩡히 이십여 년을 가만히 있다가 난데없이 잠옷이냐고 말입니다.


살다 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는 경우가 더러 생깁니다. 안 하던 짓을 하려다간 욕받이가 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니까요. 미친 척하고 옷장 문을 열어 잠옷을 꺼내봐야겠습니다. 몸에 걸치는 동안 주문처럼 입으로 되뇌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쨌건 간에 입고 잘 정도는 되어야 할 테니까요.


저자는 저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잠옷은 소중한 저를 위한 잠드는 의식에 꼭 필요한 제복이라고 말입니다. 다른 모든 옷들은 사실상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오직 잠옷만은 저를 위해 입어야 하는 옷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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