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TV에서 어떤 사람이 한 나이 든 여성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리 잘하는 남자, 다정한 남자, 친절한 남자 등 몇 가지 조건을 내세우며 어떤 남자가 가장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아무래도 일평생을 남편 뒤치다꺼리에 지친 사람일 테니, 당연히 요리 잘하는 남자를 가장 선호하지 않을까 예상하던 차에 들려온 그녀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다 필요 없어요! 저는 집에 없는 남자가 제일 좋아요!
하긴 아내도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10년 뒤에 정년퇴직을 하고 나면 집구석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낮에는 무조건 밖에 나가 있다고 들어오라고 말입니다. 밖에서 돈벌이가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최상이겠지만, 정 안 되면 취미 생활이나 소일거리를 하다가 들어와도 좋다고 하더군요.
삼식이, 시쳇말로 퇴직 후 집에 붙어 있으면서 밥때만 되면 밥 내놓으라고 재촉하는 대책 없는 노인이 가장 혐오스럽다는 말을 들은 적도 많습니다. 세상의 변화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그들 삼식이들은, 되려 '사식이'나 심지어 '오식이'를 부러워한다고도 하더군요. 나이가 들면 집에 붙어 있겠다는 것도 여간 눈치 보이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출근 시간엔 잘 보이지 않습니다만, 퇴근 시간이면 늘 역에 나와 삼삼오오 모여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을 보곤 합니다. 그들에겐 대체로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일단 여자는 거의 없다는, 아니 아예 없다는 것이고, 거의 한 자리에서 줄곧 시간을 보낸다는 점입니다. 그냥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나 나눈다거나 가령 바둑이나 장기 등을 두며 시간을 보낸다면 모르겠는데, 줄담배를 피우고 대낮부터 소주나 막걸리 등으로 시간을 때우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술이 한 잔 들어가나 주변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누가 옆을 지나가건 말건 큰 소리로 그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늘 안타까움을 넘어서 씁쓸하다는 생각이 들고,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저조차도 왜 저러고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게 되곤 합니다.
나이 들면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나옵니다. 물론 철칙은 아내의 손을 빌리지 않는 것입니다. 시리얼로 때우든 제대로 차려서 먹든 혼자의 힘으로 해결합니다. 일단 집을 나서면 그다음 행선지는 집 근처에 있는 공공도서관입니다. 하루 종일 책을 읽거나 글을 씁니다. 불가피하게도 점심은 밖에서 사 먹어야 합니다. 돈은 들어도 그게 아내를 배려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길이고, 가정에 평화가 깃들면 그것이 곧 세계가 평화롭게 되는 길입니다. 도서관 문을 닫는 시간에 집으로 옵니다.
따지고 보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만, 지금까지 제가 본 노인들의 모습을 보면 과연 제가 나이가 더 들어서 제가 생각한 대로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늙어도 잘 늙어야 하겠습니다. 곱게 늙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곧 이웃에 민폐가 되지 않는 길일 테고,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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