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자료를 보니 전 세계의 총인구가 무려 80억 7천4백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중에서 29번째로 인구가 많은 우리나라는 5174만 명이라고 하고요. 어차피 정확한 숫자는 모릅니다. 대략 그 절반쯤인 40억 명이 여자라고 봤을 때 제 아내는 1/40억에 해당되는 셈입니다. 어쩌면 억세게 운이 없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하필이면 저 같은 사람을 만났고, 2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저와 함께 살고 있으니까요.
어제 쓴 글에서, 사람의 마음을 선명한 색으로 물들이는 것은 기적이란 얘기를 했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런 기적이 있었으니 근 30년을 따로 떨어져 살아온, 일면식이라고는 없던 아내와 제가 만나게 된 것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건 기적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일입니다. 아마 두 사람 다 당시에 제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면 결코 한 가정을 이룰 일은 없었을 겁니다.
사실 젊었을 때에는 그놈의 알량한 자존심이 문제였습니다. 다른 일을 할 때나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낼 때는 눈에 띄지도 않던 승부욕이 불타오르곤 했던 것 같습니다. 그까짓 말싸움 한 번 지면 당장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할 듯 보였던 모양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기를 쓰고 이겨 먹어야 그다음이 있는 줄 알았나 봅니다. 이만큼 세월이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이게 어쩌면 철이 들어간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더는 다툴 기력이 없어서 그러는 것일까요? 요즘 따라 아내를 보면 안쓰럽다는 생각만 자꾸 듭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그래도 한때는 제법 눈부신 미모를 자랑했는데, 어느새 늙수그레하여 배만 나온 중년아줌마가 옆에 앉아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눈을 씻고 다시 아내를 쳐다봅니다. 내가 알고 있던 그 사람이 맞는지, 보자마자 첫눈에 반하게 했던 그 사람이 맞나 싶어서입니다. 얼핏 오래전 그 느낌이 남아 있습니다. 한 남자를 몹시도 설레게 했던 그 기운이 말입니다.
이젠 뭐랄까 아내를 보면, 최전방의 같은 부대에서 동고동락하며 23년을 복무해 온 전우를 대하는 기분이 듭니다. 슬쩍 손 한 번 더 잡아주고 싶고, 어깨 한 번 더 주물러 주고 싶어 집니다. 이 더위에 오늘 하루는 어찌 보냈는지 묻고 싶습니다. 별로 재미있지도 않은 얘기에도 눈을 맞춰가며 들어보고 가능하다면 한 번쯤 미소도 지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음뿐입니다. 마음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겠습니다.
뭔가를 말하려 했다가도 겸연쩍은 마음에 말을 이어가지 못합니다. 나이와 함께 점점 사라지는 용기 탓인지 몇 번이나 손을 뻗었다가 내민 손을 도로 거두어들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언제 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과연 그런 말을 하긴 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이젠 그런 마음마저 사라졌나 싶어 곰곰이 따져봐도 꼭 그런 건 아닌 듯했습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는 건 알면서 왜 고작 그 간단한 말 하나로 아내를 즐겁게 해주지는 못할까요?
오늘은 기어이 '사랑한다'는 말을 해봐야겠습니다. 분명 미쳤다는 말을, 어디 아프냐는 말을 들을 게 뻔하지만, 그래도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설령 싫은 소리 한마디 듣는다 해도 따지고 보면 밑져야 본전입니다. 이런 것도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