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주제: 자신의 명절 풍경을 써 주세요.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명절 같은 명절을 보낸 기억이 없었습니다. 혹시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초임 발령을 받을 때만 해도 학교에는 일직이라는 게 있었는데, 이 일직은 일요일은 물론 공휴일에도 비상대기조로 교무실에 당번근무자가 1명 배치되곤 했습니다. 제가 왜 이 얘기를 꺼냈는지 짐작이 가시는지요? 일부러 일요일을 앞두고 이 당번근무를 자처하기 일쑤였고, 설 연휴나 추석 연휴 때에는 무조건 무리를 해서라도 이틀 정도씩 근무를 하곤 했습니다. 남들이 다 쉬는 명절 연휴에 왜 그렇게까지 했느냐고 묻는다면 제가 답변할 수 있는 건 이것뿐입니다. 그만큼 제겐 집이 편하지 않았다고, 게다가 명절 연휴엔 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고 말입니다. 네, 맞습니다. 일종의 도피였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끔찍한 분위기에서 놓여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INFP에 속합니다. 이에 반해 저의 아내와 돌아가신 저의 아버지는 ESTJ입니다. 두 사람의 성향이 같으니 누가 봐도 융화가 잘 될 것 같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싸웠습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싸움'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겠지만, 늘 만날 때면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곤 했습니다. 물론 아내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습니다. 아내의 어떤 말에 아버지가 분노하고, 아버지는 그 분노를 저에게 쏟아내셨습니다. 부끄러운 기억이긴 합니다만, 물론 본가를 갔다가 오는 길에 아내는 저를 쥐 잡듯 잡았고요.
일전에 얘기했듯 결혼은 두 사람이 사랑해서 하는 운명적인 시스템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철 모르고 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조금만 살아보면, 아니 결혼해서 몇 달만 살아봐도, '우리 둘만 잘 살면 되지'라고 하는 게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걸 알게 됩니다. 명백히 결혼은 일대일의 결합이 아니라, 삼대삼의 결합이었습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해도 그 여섯 사람 중에서 가장 막중한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남편, 즉 본가로 봤을 때에는 아들인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아마도 제가 그 역할을 제대로 못했으니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는 집안 분위기를 만든 게 아닌가 싶긴 합니다.
누구의 잘못인지, 혹은 제가 어떤 부분에서 말이나 행동을 실수했는지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건 확실합니다. 죽기만큼 가족 모임을 싫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가족 모임이 자연스레 이루어지게 되는 명절을 끔찍하게도 싫어했고요. 심지어 나중에는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날이면, 그럴 때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심하게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가족 모임에 안 가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글쎄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다투곤 했던 그 일들이 과연 싸울 일인가 싶기도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잔잔한 파도 같은 집안이었지만 어느 한쪽에서든 뇌관을 건드리기만 하면 언제든 터질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본가를 갔다 올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던 아내가 저보고 어떻게 좀 해보라고 합니다. 그때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겠지 싶어도, 솔직히 그때 제겐 선택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내의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양쪽에서 쏟아내는 분노를 한 몸에 다 받아내야 했습니다. 어쩌면 당연히 저는 본능적으로 그때마다 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고요.
정작 가족 모임은 얼마 안 가 와해되고, 급기야 한동안은 명절이 되어도 본가에 저만 가는 날들이 늘어났습니다. 저는 차라리 그게 편했습니다. 아무리 어리다고는 하지만 두 아이들을 데리고 기껏 가서 아내에 대한 험담이나 들어야 하고, 또 어떤 말들은 반드시 아내에게 전하라고 하며 나중에 다시 들르면 잊지 않고 아버지께서 제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말에 대해 아내가 뭐라고 대답하더냐고 말입니다. 물론 저는 거짓말을 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늘 유행가 가사처럼 저에게 퍼부으시던 잔소리가 있었습니다.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뜯어말릴 때 결혼하더니, 이게 도대체 뭐냐며, 참 잘하는 짓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 상황에서 제가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아내도 아버지 싫어합니다,라는 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자연스레 저는 본가에 오래 있기 싫어집니다.
본가에 들른 날은 저녁에 집에 가기가 싫어집니다. 얼른 볼 일만 보고 집으로 가면 마찬가지로 또 한 번의 공식적인 아내의 취조 아닌 취조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번엔 아내가 제게 묻습니다. 아버님이 뭐라고 하지 않더냐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들은 그대로를 전할 수는 없습니다. 기껏 떼어놨는데, 굳이 싸움을 붙여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저는 아버지가 한 말을 최대한 순화하여 아내에게 전합니다. 아내는 제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바보로 아느냐며 아내는 귀신같이 원래 아버지가 하려고 한 말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가서 이렇게 저렇게 전하라는 말을 합니다. 저는 그 어느 누구의 말도 전할 수 없습니다. 기어이 중간에서 말을 잘라먹고는 전했다고 하고, 거기에 제 생각을 곁들여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저 또한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곤 했던 기억도 납니다.
거의 10여 년을 그렇게 하고 나니 가장 피폐해진 것은 저였습니다. 종종 아내는 제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어떻게 명절에 자기 집에 가도 단 하루를 자고 오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사실은 대놓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당신 같으면 이런 분위기에 자고 올 마음이 생기겠느냐고 말입니다. 괜히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러 있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음에 타격을 받는 건 오직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으니까요.
2019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저는 솔직히 태어나서 그렇게도 홀가분하고 자유로웠던 날을 느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속된 말로 ‘잘 돌아가셨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이제 더는 중간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저는 한 인간으로서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제게 특별한 명절의 풍경은 없습니다. 늘 불구덩이 속의 화약 같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비로소 제게도 평화가 찾아들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할 뿐입니다. 이 평화가 싫을 리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과연 그 암울했던 때를 어떻게 지나왔나 싶을 정도로 정말이지 대책 없이 힘들었던 나날이었습니다. 남들은 뭐라고 할지 몰라도 한창 힘들었을 때는 나쁜 마음까지 먹은 적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몇 살이 되었건 간에 사실 혼자가 되는 것은 외로운 일입니다. 다만 제게는 그 외로움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지금의 이 평화가 좋습니다. 최소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돌아가신 뒤로는, 적어도 본가 쪽에서의 불협화음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유의 몸으로 놓여난 게 불과 5년 전입니다. 그 후 5년 동안은 자유를 만끽하며 때로는 여유를 누리면서 그렇게 명절을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가끔은 무슨 사레라도 들리듯 그 오래 전의 악몽이 다시 떠오를 때도 있습니다. 충분히 편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있지도 않은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두 번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명절의 풍경이었습니다. 이젠 돌아갈 리도 없을 테지만, 간혹 처가에 갔을 때 처가의 친지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순간이면 제가 바짝 긴장하는 것도 어쩌면, 그 자리가 바로 그 악몽의 연장선이 되면 어쩌나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먼 미래에 명절이 없어진다면, 명절 연휴가 없어진다면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박수를 치면서 가장 기뻐할 사람이 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전 늘 아주 오래된 체기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