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에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다른 학교 선생님 한 분을 만나기로 했거든요. 저보다 다섯 살이 많은 분으로 여자분이십니다. 알고 지낸 지는 10여 년쯤 되었습니다. 학교가 다른 관계로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늘 무슨 일이 있거나 적어도 1년에 한두 번은 뵙는 분이십니다. 묘하게도 제 아내와도 안면을 튼 분이라 이렇게 정기적으로 제가 그분을 만나는 것도 거리낌 없는 상황이고요.
그분을 알게 된 건 제가 구미시에서 근무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때 그분은 어떤 분과 늘 같이 다니셨습니다. 그 선생님은 저보다 한 열 살쯤 많으신데 이미 정년퇴직하신 상태고요. 기차에서 오며 가며 늘 마주치는 분들이었으니 꽤 어정쩡한 사이였던 겁니다. 얼굴을 하도 자주 봐서 아예 모르는 사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말 한마디 못해 본 그런 사이였으니까요.
그러다 누가 먼저 시작한 건지 모르지만, 어떤 일을 계기로 서로 목례를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언제든 어느 한쪽에서 말만 건네면 대화가 이루어질 준비가 된 것입니다. 저는 원래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대구에서 구미까지의 30분 거리를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며 기차를 타고 다닐 수 있다는 건 적잖은 행운이었고요.
두 분 중에서도 특히 오늘 만나는 그 분과 마음이 더 잘 맞아 아주 가끔 같이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곤 했습니다. 저희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도 오셨을 만큼 친분이 두터워졌습니다. 물론 해마다 서로의 생일이 되면 잊지 않고 축하 메시지와 함께 기프티카드를 보내면서 축하의 마음슬 전달하곤 합니다. 오죽하면 저희 아내가 그분을 두고 제 '기차 여친'이라고 말할 정도니까요.
사실 요즘과 같은 때에 여자선생님과 그런 인연을 이어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서 괜한 오해를 사기도 쉽고요.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 소중한 인연이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건 그 분과 저의 성격이 잘 맞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해도 코드가 잘 맞아서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기도 하고요.
일단 그분도 책을 좋아합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납니다만, 처음 말을 틀 때에도 매일 기차 안에서 책을 읽고 있던 제게 책과 관련된 얘기를 하면서 시작되었던 걸로 알고 있으니까요. 서로가 읽었던 책에 대해서 이야기도 하고, 또 아주 가끔은 읽어볼 만한 책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구미에서의 근무 연한이 다 된 3년 전부터는 그리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항상 안부 인사는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은 초등학교와 중등학교가 통합된 어느 사립 특수학교에서 근무하고 계십니다. 인정하지 않는 분들이 많긴 하나, 사고의 폭이나 깊이 등이 다른 직장인에 비해 턱없이 좁고 얕은 게 특징인 우리 같은 교사-특히 그 정도에 있어선 초등학교 교사가 더 심하고요-의 한계가 느껴지지 않는 분이라고나 할까요?
이럴 때 설렌다는 표현을 쓰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오늘처럼 그 선생님을 만나는 날이 되면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하며 궁리를 하기도 합니다. 학교가 바뀔 때마다 많은 선생님들을 알고 지냅니다. 또 같은 학교에 근무해도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선생님들과 안면을 트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적으로 인연을 이어간다는 게 분명 쉬운 일은 아닙니다. 1년에 한두 번밖에 만나지 않는다고 해도 소중한 인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