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수를 하고 대학에 들어간 저는 한 여학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클에서 알게 된 친구였는데, 학번은 같지만 나이는 저보다 두 살 어렸습니다. 아래로 여동생이 둘 있는 그녀가 의외로 오빠, 오빠, 하며 참 잘 따라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같은 과(저와는 과가 달랐고요)의 한 선배와 갓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녀에게 특별한 사심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와는 의외로 대화의 코드가 잘 맞았습니다. 학과는 달라도 동기다 보니 겹치는 수업이 몇 건 있어서 함께 하는 시간도 늘어났고요.
그러던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그녀와 사귀는 선배라는 사람이 갑자기 저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도 저보다는 나이가 어렸기에 말을 편하게 하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씨, 혹시 제 여자친구 좋아하세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이는 선배님이 사귀는 여자친구잖아요? 그런데 제가 왜 **이에게 사심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정말이죠? 알겠습니다. 그 말을 믿어보기로 하지요. 하긴 **씨가 넘보기엔 좀 무리가 있는 아이지요.”
순간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제자 넘보기엔 무리가 있다니요? 어떤 식으로 들어도 제 귀에는 ‘니 꼬락서니를 알아라’라는 말로 들렸습니다.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사심은 없었다고 해도 어쨌거나 호감 정도는 있었으니 저는 대뜸 선배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선배님! 자신감이 상당하시네요. 좋습니다. 그러면 제가 정정당당하게 도전장을 던지겠습니다. 저, **이를 선배님에게서 빼앗도록 하겠습니다. 긴장하셔야 할 겁니다.”
“뭡니까? 사심이 없다는 말이 거짓말이었네요. 뭐, 좋습니다. 마음대로 해보세요. 세상에는 마음먹는다고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요.”
전 그날 바로 그녀를 불러냈습니다. 좋아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완벽히 이성적인 마음까지는 아니었다고 해도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으니, 영 틀린 말은 아닌 셈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그렇게 저돌적이고 대책 없는 사람이 아닌데,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해서 그렇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것입니다. 시쳇말로 두 사람 사이의 진도가 어디까지 나간 건지는 모르지만, 손을 잡으면 손잡았다고, 포옹하고 나면 포옹했다고, 심지어 그 아이와 키스를 한 날에는 학과의 모든 사람들이 알 정도로 떠들고 다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너처럼 괜찮은 여자가 저렇게 한심한 인간하고 어울리는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너를 저 인간에게서 구해내겠다’라고 말입니다.
저에게서 공식적으로 도전장을 받아들인 선배라는 그 사람은 그날 이후로 수업이 끝나고 나면 그 아이를 자신의 손아귀에서 놔주지 않았습니다. 저녁 식사는 물론이고, 밤이 늦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의 차가 끊기기 직전에 그녀를 집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도 참 남자답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늦은 시간에 집에 보내면 대개 데려다 주기 마련인데, 그냥 학교 앞 버스정류장에서 혼자 보내곤 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그녀와 함께 버스를 타고 집에 갔다가 집에 들어가는 걸 보고 저는 돌아오곤 했습니다.
물론 그때까지 저는 그녀에게서 좋아한다는 고백을 듣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사귀자는 말조차도 듣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뭐, 그래도 저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속된 말로 저의 여자로 만들 자신은 없었어도 그 인간에서 떼어 낼 자신은 있었습니다.
그렇게 여름과 가을을 보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는 그 인간과 시간을 보낸 그녀, 밤늦게 풀려난 뒤에야 저와의 그 짧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그녀에게 저는 늦가을 무렵, 흰색 일색의 목도리와 장갑, 그리고 모자를 선물했습니다.
“언젠가 내 고백을 받아들이겠다는 결심이 서면 이 목도리와 장갑과 모자를 쓰고 내 앞에 나타나 줘.”
그때는 그래도 제가 제법 인내심이 있었나 봅니다. 원래부터 누군가와 보자마자 눈이 맞거나 해서 당장 연애를 시작하는 그런 스타일이 아닌 저로선, 먼저 고백하고 상대방의 답변을 기다리는 데에는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겨울방학 중이었습니다. 친구가 아르바이트를 같이 하자고 해서 동아쇼핑센터에서 3주 정도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6층(솔직히 6층인지 8층인지 헷갈립니다만, 그냥 6층이라고 하겠습니다)의 비둘기 공원이 바로 제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 공원의 공식적인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워낙 많은 비둘기들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라 그냥 그렇게 불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하는 아르바이트는 굉장히 단순한 일이었습니다. 동아쇼핑센터를 이용하는 고객들의 연간 구매실적을 A, B, 그리고 C 등급으로 분류하여 그 구매 실적에 상응하는 사은품을 지급하는 일이었습니다. 같이 일을 하던 사람은 모두 6명, 남자 4명과 여자 2명이었습니다. 여자들은 사은품을 나눠줄 때 고객들의 명단을 확인하고 서류에 기입하는 일을 했고, 남자 4명은 공원 한편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사은품을 적재하거나 아래로 내려 고객들에게 가져다주는 일을 했습니다.
아마 그날도 오전 중에 한창 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난 뒤였던 걸로 기억을 합니다. 날씨는 상당히 추웠습니다. 첫눈인지 아닌지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하늘에서는 눈도 내리고 있었고요.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남자들은 사은품 상자가 쌓인 꼭대기 위에 올라가 휴식을 취하곤 했습니다.
공원에선 가수 최연제의 ‘너의 마음을 내게 준다면’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노래 1절이 대략 끝나갈 무렵 6층 매장에서 공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누군가가 공원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색으로 감싼 한 여자였습니다. 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기에 그녀가 하고 나온 모자나 목도리나 장갑을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제가 선물한 것이었습니다.
그녀에게 들키진 않았지만, 전 사은품 상자 꼭대기에서 잠시 눈물을 흘렸습니다. 선배라는 그 인간에게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정말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확신해 본 적이 없었기에 저조차도 그때의 일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그녀가 얘기하더군요. 그날 선배를 먼저 만나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고, 저에게 가겠다고 말입니다.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머지 네 명에겐 말한 적이 없지만, 친구가 떠드는 통에 다른 사람들도 그녀가 누구인지를 단번에 알아챘습니다. 세 시간 정도 할 일이 남아 있었지만, 나머지는 자기들이 알아서 할 테니 아무 염려 말고 먼저 들어가라며 등을 떠밀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던 흰 눈, 그녀의 머리를 장식한 흰 모자, 목을 감싼 흰 목도리, 그리고 흰 장갑까지 온통 흰색 천지였던 그때의 장면이 저는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저에게는 가장 화려했던 겨울,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던 추억이 새겨진 겨울이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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