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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치고써 Dec 19. 2023

구세대 사람

이백 네 번째 글: 모르는 게 죄인가요?

오늘 오후 정규 수업을 마치고, 4~6학년 선생님들과 관리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교육 현안에 대한 문제와 관련한 간담회 자리를 가졌습니다. 관리자가 동석하는 자리라 편하진 않았지만, 뭐 그래도 그다지 나쁘진 않았습니다. 학교가 아닌 바깥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면, 학교에서 논의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조금은 더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얘기가 진행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바로 간담회 장소와 관련하여 일어났습니다. 물론 다른 분들은 하등의 문제가 없었습니다. 유독 저에게 걸림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모인 곳은 한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 매장입니다. 당연히 커피는 기본이고 여러 가지 빵 종류를 팔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먹어보진 않았지만, 식사도 가능한 곳이었습니다. 어쨌거나 다 모이고 보니 하필이면 제가 나이가 제일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어야 한다,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 관계로 저는 그런 자리에 가면 자동적으로 말 수를 줄이게 됩니다. 어딜 가서든 말을 많이 해서 득이 된 경우는 없었다는 걸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메뉴를 시키는 시점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동학년 선생님들이 친절하게도 저에게 물었습니다.

"부장님! 뭐 드시겠어요?"

"네, 저는 바닐라 라떼 따뜻한 것 마시겠습니다."

자신 있게 아는 것 정도가 바닐라 라떼,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 카라멜 마키아또, 돌체 라떼 정도이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여기까지는 자신 있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마다 마실 음료를 고르더니 다시 저에게 화살이 돌아옵니다.

"부장님! 디저트로는 뭘 드시겠어요?"

"디저트요? 음, 저는 그냥 빵 종류면 됩니다만……."

평소에도 무척 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는 옆반 선생님이 싱긋 웃으며 메뉴판에 있는 몇 가지를 읊어댑니다.

"빵 종류도 무척 많아요. 약과 휘낭시에, 플레인 베이글, 허니 버터 브레드……."

그 외에도 몇 가지를 줄줄 불러주는데, 솔직히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더군요. 아마도 제가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나 봅니다. 그 선생님이 다시 한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러면 부장님, 저희가 시키는 거 같이 드세요. 맛있는 거 시킬게요."

생각해 보면 그게 뭐 그다지 부끄러운 일도 아닐 수 있지만, 순간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쩐지 제가 있으면 안 되는 자리에 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맨 끝쪽 테이블에 앉은 고작 저보다 다섯 살 정도 적은 남자 선생님은 메뉴를 훤히 꿰고 주문을 받고 있는 지경인데, 저는 본의 아니게 뒷방 늙은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사실 따지고 보면 이제 50대 초반인 저도 나이가 그렇게 많다고는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더 그런 기분에 사로잡힌 것 같기도 합니다. 참 우스운 사실은, 그렇게 시켜서 나온 메뉴가 하나같이 맛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 데 오면 이거 다시 한번 시켜 먹어봐야겠다.'

저 나름 다짐 아닌 다짐을 하지만,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 메뉴의 이름을 그때까지 외우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간담회를 마치고 집에 와서 아내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했습니다.

"어디 가서 제발 늙은 티 좀 내지 마라."

"그렇다고 뭘 그렇게까지 얘기하노?"

"요즘 같은 세상에 니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그 정도는 다 안다."

"모를 수도 있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노? 사람들하고 대화는 되더나?"

아내는 제가 선택한 길이라고 하며 그냥 운명처럼 받아들이라는 말을 던졌습니다. 꼭 유행이나 트렌드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나름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것들에 미리 가치가 없다고 단정을 지은 제 잘못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어딜 가면 툭하면 카라멜 마키아또나 마시지, 하는 아내에게 요즘은 바닐라 라떼도 마신다는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습니다.


정말이지 오늘 같은 자리는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자리였습니다.


사진 출처: 작성자 본인이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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