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에피소드 6
성인 자녀와 부모의 관계는 새롭게 쓰여야 하는 부분이 있다.
영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의 마지막 장면은 아들의 내레이션으로 끝이 난다.
"나이가 드셔도 항상 저보다 앞서 가시죠.
저 길 멀리 앞에요.
당신들이 영원히 강인하기를 바라는 절 용서하세요.
당신들의 불행을 두려워하는 절 용서하세요.
당신들의 고통은 제 고통입니다.
당신들이 견뎌내면 저도 견딜 겁니다.
제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그 길을 함께 걸어요.
그리고 절 놓아주세요."
이 마지막을 몇 번이나 돌려보았다. 이별을 요구하는 아버지와 그에 많은 상처를 받은 어머니, 평정이 무너진 가족 관계 안에 아들이 있었다. 아들은 부모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함께 하며 혼란스러워하는데.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선이 모두 훌륭했지만, 아들의 마지막 내레이션에서 나는 많이 울었다. "제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그 길을 함께 걸어요. 그리고 절 놓아주세요."
성인 자녀와 부모의 관계는 새롭게 쓰여야 하는 부분이 있다. 『50이면 육아가 끝날 줄 알았다』에서 심리학자 로렌스 스타인버그는 자녀와 부모 간의 정서적 거리감이 생기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며, 성인이 되어 독립한 자녀를 부모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세부적인 지침들로 조언한다. 정신건강의학 전문의 한성희는 『벌써 마흔이 된 딸에게』에서, 마흔이 넘어 늙은 부모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자녀의 감정을 이야기한다. 심리적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약해지는 노년의 부모는 점점 자식들에게 많은 것들을 기대게 되는데, 자녀들이 이를 돕고 해결해 나가면서도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연유에 관해서이다. 연민과 함께 반감이 들 수도 있다. "그때는 나한테 이러이러한 상처를 주었으면서. 이제 와 서운함과 기대를 보내니 버거워." 이러한 마음이 아닐까. 더더군다나 아픈 부모를 보면 나의 미래 모습 같아 두려움을 느끼는 자녀는 그러한 상황을 외면하고 싶어 할 수 있다는 한성희 저자에 이어 다른 정신의학 전문의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접한 것은, 자녀는 자신과 위치를 바꿔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부모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돌보는 자와 돌봄을 받아온 자 간에 일방향으로 형성된 단단한 관계성일 것이다. 어릴 적 아이들에게 그들의 부모는 영웅이자 권위 있는 어른이니까. 더해서 일본의 정신의학 전문의인 사이토 다마키가 모녀 관계를 주제로 엮은 대담집인 『나는 엄마가 힘들다』에서도 성인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 대해 진솔하고 개인적인 관점들이 제시된다. 성인이 된 자녀와 부모 사이에 생겨나는 객관적 거리감, 독립과 죄책감에 대해 유의미한 언급이 흘러나온다. 성인이 되어 타인과의 관계가 늘어날수록 가족 간의 유대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엄마로부터 최대한 벗어나야 한다는 것.
장황하게 권위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줄줄이 늘어놓은 이유는 '힘'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인 자녀가 부모에게 이러이러한 감정과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이야기가 아닙니다',라고 앞서 건네고 싶은 것이다. 부모자식 관계에 관한 생각을 풀어보자니 나 역시도 감히 천륜을 헤집는 기분으로 억눌린 죄책감과 불안감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어 '집'―정확히는 내 부모, 그들과 주고받던 모든 일상과 생각의 소통들―을 떠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나의 세계는 이윽고 방향을 틀고 여러 방면으로 확장된다. 하지만 떠나 있는 곳에서의 삶이 힘들고 지치면 다시 이전의 안온했던 부모의 품으로 돌아와 회복을 취하기도 한다. 이전과 다르게 짧은 순간 우리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단지 '회복'이다. 더 이상 나의 복잡한 머릿속을 그들과 나눌 수 없고, 나의 고유한 문제에 그들이 답할 수 없다는 거친 직감의 순간이 늘어난다. 그러다 보면 곧 다시 나의 세계로 돌아갈 채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간 이러한 시간들이 반복되고 세상에서 나만의 경험은 계속해 쌓여간다면. 어느 순간, 마주한 내 부모가 낯설어진다. 그들은 더 이상 내 모든 것을 알고 있지 못하고, 그리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못함을 알게 된다. 그것은 죄책감과 희미한 불안을 동반하기도 하며, 때로는 벗어나기 어려운 짐처럼 작은 분노가 생기기도 한다. 부모에게 낯섦을 보는 것은 드디어 한 사람 대 한 사람으로 마주 선다는 의미이다.
나와 엄마는 비를 맞으며 서로 바라보았다. 엄마는 모르는 사람을 보듯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 때문에 엄마가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고 다가가기가 망설여졌다. 내 앞에 서 있는 나이 든 여자는 방랑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빗속의 여자는 마치 집 없는 방랑자 같았다. 옷도 잘 차려입고 비에 씻기지 않는 화장도 했다. 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여기에 있을 이유가 전혀 없는, 머지않아 다음 장소로 갈 방랑자, 엄마의 눈에 어쩌면 나도 그렇게 비쳤을지 모르겠다. 나는 엄마의 시선으로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보고 싶었다.
가쿠다 미쓰요의 『마마보이』 수록, <빗속을 걷다>
엄마, 아빠, 그들에 대해 성인이 되기 전 지녀왔던 인식은 뭉뚱그린 채 '부모'에 가까웠다.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엄마는 엄마였고, 아빠는 아빠였다. 마치 세상에는 '엄마'나 '아빠'라는 정해진 인물들이 있는 것처럼. 어떠한 사람이고 어느 삶의 배경을 지닌 인물이고 타고난 기질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이해하려 시도하지 못한다. 그러나 완벽히 나와 다른 수많은 타인 중 한 사람이라는 자각으로 부모를 타자화하기 시작한 것은 성인이 된 어느 시점부터였다. 내가 천천히 부딪히며 내리게 된 판단들 중 몇몇은 신선했고 몇몇은 안타까웠고 몇몇은 실망스러웠다. 이런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숨 쉬듯 자연스러웠던 부모와 자녀 간의 돌봄과 사랑으로 맺어진 공고한 관계성―약간은 허구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자녀에게든, 부모에게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와 자신 사이에 건강한 거리감을 두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해온 삶의 시간으로 어린 나의 모습이 빚어졌을지라도, 조금씩 형상은 달라져 나는 독특해졌다. 나를 그들의 딸로 바라보기보다 특질을 가진 한 사람으로, 그들을 나의 엄마, 나의 아빠로 바라보기보다 나와 비슷하거나 다른 특질을 가진 개개의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럴 때 오히려 그들의 욕구, 판단, 기대를 조금은 더 동등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우리는 때때로 서로를 연민할 것이고 따뜻한 공감의 순간도 있겠지만, 떨어져 있는 각자의 삶이 무관하게 흘러가기도 하고 몰이해의 어긋남도 있을 것이다. 결국 하나의 덩어리가 아닌, 두 개의 덩어리인 것이다. 그 사실을 기억하자. 성인 자녀와 부모 간의 거대한 혼돈을, 자녀의 마음속에 서서히 드러나는 소용돌이를, 언급한 세 종류의 텍스트가 충분히 담아내고 있지 않나.
내 생각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상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에만 골몰하는 대신 더도 덜도 말고 딱 1분이라도 그저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됐을 정도로 그 긴긴 세월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우리 두 사람 다 감격하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로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이 평정심도 꾸준하게 지속되지는 못한다. 공중에 흩어져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가 활기와 함께 되살아나기도 한다. 가장 필요할 때 끝끝내 나타나지 않는가 하면, 그 힘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서 나타나기도 한다. 이 안정적인 관계는 언제 휘발될지 모른다. 어쩌면 끊임없는 변화, 유동적인 상태야말로 우리가 날마다 맞닥뜨리는 진실이 아닐까 한다. 이 불안정성이야말로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요 인생의 신비와 약속을 관통하는 진리가 아닐까. 엄마와 나는 더 이상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있지 않는다. 드디어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영구적으로 성취되었다. 나는 우리 둘 사이의 거리를 흡족하게 엿본다. 약간의 공간이 나에게 이따금 찾아오는 일용한 기쁨을 가져다준다. 내가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날 것이라는 믿음.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