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지 십 년이 넘었고 딸이 둘 있다는 30대 주부가 한 신문의 여성 칼럼란에 투고했다. 본인의 가정이 얼마나 행복한지 자세히 써 내려간 내용이었다.
이 투고자에게는 그 글을 읽을 사람에 대한 배려가 눈곱만큼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제 행복 좀 보고 가세요. 이렇게 행복한 사람 아무도 없을걸요, 제 말이 맞죠?'라는 노골적인 자아도취와 교만이었다.
다나베 세이코의 『인생은 설렁설렁』
폴란드 시인 비스와봐 쉼보르스카의 시에서 한 시구―쉿, 나무를 두드리자―를 소리 내 읽는다. 쉿, 나무를 두드리자.
시구에 덧붙여진 설명에 의하면 폴란드를 비롯한 일부 유럽국가에서는 '건강'이나 '행운'을 과시하는 말을 할 때, 이를 천기누설이라 생각해서 불운을 막기 위해 나무를 두드리는 풍습이 있다고 했다.
나 또한 행복에서라면 지나침보다는 모자람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 너무 행복해요'하는 사람보다는 '뭐, 그럭저럭이요'라는 사람이 더 좋다. 겸양의 미덕이랄까. 나는 어떤가 하면 무엇을 누리고 있을 때조차, 하물며 그것이 타인의 눈에 행복의 요건처럼 비칠까 우려되면 점점 더 작은 마음으로 행동을 웅크린다. 조금은 다른 사람을 향한 배려일 거라 생각한다. 내 치장된 행복(나도 늘 이런 행운을 누리는 건 아니에요, 내 뒤에 산더미 같은 곤란함을 알면 놀랄 거예요)에, 혹 타인은 삶의 아쉬움을 토로할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의 요건들은 원하는 대로 갖추어갈 수 있다고, 이미 이러이러한 것들을 갖추었다고 자신만만하게 구는 이들이 불편했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자신의 본질에 가까운 삶을 애타게 살아나가는 중에 선물처럼 주어지는 순간적인 만족감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이들에게 꾸며서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구체적으로 얻어내야 하는 무엇도 아니다. 아주 자족적이고 순간적인 경험일 뿐이다. 결국 무슨 마음인지 들여다보면, 지나치게 노력하는 행복을 믿지 못한 건 아닐까 싶다. 그것도 아니라면, 사람들이 닳도록 꺼내 들고 모두 도달하려 하는 비슷한 행복의 관념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언젠가 가벼운 인연으로 지나치던 타인의 친절한 한마디, '애쓰지 마요'. 나는 이후로 그 말을 나에게 자주 들려준다. 특히 행복에 대해서라면, '애쓰지 마요'.
요즘은 행복을 과시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SNS라는 또 다른 가상의 세계에서 모두 자신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진실일까? 그렇지 않다.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다. 진실은 한 장의 사진에, 몇 줄의 단편적인 문장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타인이라는 관람객을 상상하면서 저장하는 나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은 어떤 의미인가.
행복을 전시하는 것. 두려움도 없이 양심의 가책도 없이 더 더 뻔뻔한 얼굴들로 많은 것들을 보여주려는 사람들. 원하는 모습으로, 그렇게 보이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에서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 나는 한 번도 지극히 개인적인 목적으로 SNS계정을 사용한 적이 없는데, 보여주기 위한 기록물을 찍고 작성할 때 느끼는 위화감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그것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친구가 예전에 어떤 잡지의 충격적인 특집 제목을 가르쳐 주었다.
"놀라지 마! '행복해 보이고 싶다'야!"
정말 놀라서 거품을 뿜을 뻔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나마 이해한다. 능동적인 바람이다. 하지만 '행복해 보이고 싶다'라니, 거기에는 이미 자신의 의지가 없다. 그저 타인으로부터 자신이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 하는 생각뿐이다. 나는 행복해 보이지만 불행한 사람보다 엄청 불행해 보여도 행복한 사람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한다.
니시 가나코의 『거미를 찾아』
누군가의 전시된 행복을 보면서 홀로 상처받은 적 있나요?
삶의 면면의 진실들을 숨긴 것이 그들의 행복이라면, 조금 낫겠어요?
우리는 남들의 행복에 덜 상처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요? 무엇을 숨기고 있나요? 그들과 뭐 다른가요?
솔직히 말하면, 나의 가장 큰 위안은, 내 삶을 버티는 가장 큰 원동력은, 남들도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보이는 것만큼 좋지도, 보이는 것만큼 나쁘지도 않다는 것. 말쑥한 모습 뒤에 모두들 거칠거칠한 삶의 이면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 위안으로 나는 오늘도 내 삶을 애타게 살아간다. 때때로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행복을 꺼내 들려는 타인을 측은하게 바라보면서.
존 치버의 단편소설, <기괴한 라디오> 중...
그런 갖가지 소리들은 그녀의 집을 둘러싼 아파트들에서 잡혀 그녀의 라디오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것이었다.
아이린은 다이얼을 계속 돌려 서너 집의 아침 식사 테이블을 침범했다. 그리고 소화불량과 육체적 사랑, 병적인 허영, 신앙심, 그리고 절망이 표현되는 이야기들을 엿들었다. 아이린의 삶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만큼이나 단순하고 보호받는 삶이었기에, 그날 아침 스피커에서 나오는 그 노골적이고 때로는 상스러운 말들에 그녀는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오후가 저물어가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이 점점 더 격해졌다.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삶이라는 게 너무도 끔찍하고 너무도 지저분하고 너무도 무서워요. 하지만 우린 그런 적 한 번도 없어요, 그렇죠, 여보? 내 말은, 우리는 언제나 다정하고 점잖고 서로를 사랑해 왔다는 거예요, 안 그래요? 그리고 우리에겐 두 아이가 있어요, 두 예쁜 아이들이, 우리의 삶은 지저분하지 않아요, 그렇죠, 여보? 안 그래요?"
"우린 행복해요, 그렇지 않아요, 여보? 우린 행복해요, 그렇죠?"
"당신은 날 사랑해요, 그렇죠?" 그녀가 다짐을 두었다. "그리고 우린 신경질적이지도 않고 돈 걱정도 안 하고 서로 속이지도 않아요, 그렇죠?"
(……)
"제발, 짐, " 그녀가 사정했다. "사람들이 우리 얘기를 듣겠어요."
"난 당신의 그 쓸데없는 걱정에 질릴 대로 질렸어. 라디오는 우리 얘기를 들을 수 없어. 아무도 들을 수 없다고. 그리고 또 듣더라도 그게 뭐가 어떻다는 거지?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