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레터 03
당신의 삶에서라면, 당신이 항상 옳아요.
대다수의 사람이 삶에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갖지 못하거나 원하지 않는 데는 슬픔이 따르기 마련이다. 셰릴 스트레이드가 "우리를 태워주지 않은 유령선"이라고 부르는 삶, 즉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삶이 안갯속에서 어렴풋이 소리 없이 스쳐 지나가는 모습에 슬퍼하는 이도 많다. 내가 아는 모든 이도, 자녀를 갖지 않는 삶을 원하고 결코 그 선택을 바꾸지 않으려는 이조차도 그 결정(그것을 결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을 내리는 데 어느 정도 괴로워했다. 타인의 기대와 다른 삶을 사는 것에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한다.
페기 오도널 헤핑턴 『엄마 아닌 여자들』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시간을 간격 삼아 깊은 곳에서 격동이 인다. 나는 곧 괜찮아질 것이고, 늘 그랬듯 여기까지 유예되어 온 시간은 오늘도 충실히 지나갈 것이다. 그때마다 속삭이는 마음 한편 또 하나의 말, '온전한 가족의 형태를 가지지 않았을지라도……'. '온전한 가족'이라는 틀에 박힌 개념도 변해가는 사회적 가치관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더 많이 받는다는 사실조차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점점 더 우리는 다양성을 포용하고, 개인의 선택과 의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그럼에도 여지없이 그 파도가 다가오면, 알 수 없는 공허함과 모든 게 잘못되어 간다는 슬픔이 미열처럼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어린아이를 충실히 돌보고 그들에게 전부를 내어주며 세상 모두에게 '무조건 옳은' 일을 하고 있는―정확히는 내가 그렇게 보고자하는― 어른들을 바라본다. 그때 내 발밑으로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리는 것이다.
늦은 밤, 아파트 창의 불빛을 바라본 적 있나요? 하나의 공으로 뭉쳐질 법한 따스한 존재들이 모여 살 것만 같은 상상 속 공간.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보듯이, 불 켜진 창을 통해 다른 이의 집 거실을 망연히 들여다본다. 그들은 행복할 것이다. 나는 편안한 공간에서 우호적인 관계의 배우자와 정신없이 바쁘지만 나름의 열정이 있는 일을 하며, 남는 시간은 오로지 책과 글쓰기로 자신의 내면을 충족시키며 지낸다. 이것은 분명 안온함이다. '하지만', 다른 많은 이들이 누린다고 믿는 미지의 것이 결핍으로 몰아치면 나도 모르게 그들의 만족감을 열망하곤 한다.
줄리엣: 얼마 동안 그녀는 가정과 남편과 아이들이 보상이라고 되는 것처럼, 마치 그런 것들이 평범하지 않은 일이고, 인간의 경험을 좀 더 세련되게 만들어 주는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했다. 어맨다: 방금 이식한 깨끗하고 활기찬 혈관에서 피가 솟아오르듯 라디에이터에서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고, 새로 설치한 조명의 불빛이 따사롭게 느껴지고, 어수선한 바깥세상을 뒤로한 채 회색빛 바다를 가르며 소리 없이 나아가는 호화 유람선의 기관실처럼 집 안의 모든 설비들이 안정감 있게 돌아가는 겨울날, 혹은 프랑스 풍의 주방문이 열리고 떡갈나무 마루의 정교한 문양 위로 황금빛 햇살이 떨어지는 여름날이 그랬다. 그럴 때면 집 안은 분명 아름다웠고, 그 거품처럼 훌륭하지만 깨지기 쉬운 잠시 동안 어맨다는 절정의 느낌을 맛보았다. 솔리: 물론 아이들 덕분에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도 많았다. 그녀는 아이들의 사랑과 인정으로 가득 찬 자루 같았다. 밖에서 보면 미련해 보이지만 속은 그녀만 알고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묵직한 자루. 메이지: 세상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없었고, 그녀로서는 두 아이가 자신에게 속해 있다는 것만 믿을 수 있으면 되었다. 바로 그 믿음, 그 절박한 믿음이 그녀를 그녀이게 해 주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그런 것 아닐까? 그런 믿음이 사람들을 눈에 띄게 만들고, 어쩌면 익명성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게 해 주었다. 어디를 가든, 당신의 원래 모습과 세상 사이엔 그런 믿음을 가진 당신의 모습이 버티고 서 있게 된다. 매기: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그건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 밤 그녀의 모습을 보면, 그 구릿빛 여전사의 모습을 보면 그녀가 정말 자신의 삶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래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결국 어떻게 될 건지는 상관없었다. 지금 매기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둘째 아들 해리처럼 머리만 큰 난쟁이 같은 아이가 될지라도, 문제는 지금 현재를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봤을 때 '그때는 정말 제대로 살았다'라고 할 만한 시기가 없다면, 지금 이런저런 것을 얻는 것이 무슨 소용 있단 말인가.
레이철 커스크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내가 발견하고 조심히 끌어올린 내용들이 진솔했기에 귀담아 들었다. 막연히 동경해 보던 그들의 삶이었으니까. 주어진 엄마로서의, 아내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겠다는 자연스러운 시간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에 다가서지 않은 채 성인기의 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엄마가 된 여자들의 낯선 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의 경험에 두려움보다는 경외심을 보냈다. 그 역할을 내가 맡아보겠다고 나서는 것과는 다르다. 나의 상황과 인생 시계는 늘 그와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아이를 기르며 넘치는 사랑을 주고, 아이가 돌아올 따듯한 공간의 주인이 되어 가족 모두가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물리적으로 정서적으로 그곳을 가꾸는 여자들은 어떨까. 아이와 남편은 그녀에게 찬사를 바치고, 그에 힘입어 여자들은 나날이 유능해지지 않을까. 그런 여자들을 떠올릴 때면 따라오는 위화감 위에 우뚝 솟은 가장 불편하고도 거창한 심정 또한 말해야 할 것 같다. 살아가는 나날에서, '나는 무엇인가?'를 떠올릴 때이다. 나라는 존재를 정의 내릴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꾸려진 가족이 있다면, 나는 내 존재를 조금 더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까? 무엇이 되지 않아도, '나는 엄마일 테다'. 그것은 역시 인간에게 주어진 제대로 된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느낌이 될 것이고, 훗날 '그때는 정말 제대로 살았다'라고 자위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나온 삶을 되돌아봤을 때 '그때는 정말 제대로 살았다'라고 할 만한 시기가 없다면, 지금 이런저런 것을 얻는 것이 무슨 소용 있단 말인가. 지금 내가 '엄마가 되는 대신' 얻고 지키려 애쓰는 삶의 소중한 면면이, 아주 나중에, 모두 쓸모없던 일로 밝혀지면 어쩌나. 충실하고 안온하다 믿어온 내 삶에 이렇게 때때로 슬픔과 불안의 파도가 덮쳐오는 것이다. 물론 온전해 보이는 가족에도 술렁 술렁이는 내면의 소리는 들린다. 실은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완벽해 보이는 이야기에, 무수한 '하지만'이 등장하는 것이다. 나의 '하지만'과는 분명 다르지만. 혹 내가 그 여자들과 같은 삶의 여정을 살게 되었을 때 때때로 다가올 슬픔과 불안의 파도는 이런 감각과 형태이지 않을까, 살짝 비틀어 생각하기도 했다. 아, 모두에게 위안을!
다만 이런 슬픔과 불안의 시기가 돌아오면, 여지없이 내 지나온 시간과 삶의 결정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의 실수, 미련, 허점을 찾아내려 하지 않겠다. 그러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삶이 여기 다다르기까지의 이해를 스스로 구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누군가에게 옳은 인생의 방향과 결정이 반드시 내게도 그러리란 법이 없다는 것을 서서히 깨우쳐 온 시간이기도 했다. "당신의 삶에서라면, 당신이 항상 옳아요."
그 밖의 자녀가 없는 대다수의 경우 어머니가 되지 않기로 한 상황은 서서히, 간접적으로, 출산과는 무관하지만 동시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일련의 결정을 통해 찾아온다. 학위를 받기 위해 대학원에 가고, 더 나은 커리어를 쌓기 위해 직장을 바꾸고,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배우자를 기다리고, 35세에 이르러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가족과 멀리 떨어진 곳에 직장을 얻는 바람에 육아에 도움받을 수 없게 되고, 다음 세대 생애에 닥쳐올 화재, 홍수, 폭풍 같은 기후 재앙을 심각하게 염려하는 것이 그 과정이다. 어떤 경우 육아휴직 없는 직장, 학자금 대출, 비싼 보육비, 21세기 미국에서 주택 마련, 은퇴의 꿈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들이 선택을 대신하기도 한다. 임신촉진제나 인공수정, 시험관 시술을 시도한 뒤 비용이 너무 많이 들거나 육체적으로 힘들어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자녀를 갖지 않기로 한 것인지 가질 수 없었던 것인지 판단하기 모호한 경우도 있다.
우리는 '지속적 지연'으로 아이를 가지지 않게 된 경우다. 즉, 삶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거나 환경이 달랐다면 어머니가 되었을 수도 있다.
페기 오도널 헤핑턴 『엄마 아닌 여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