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本生譚) 중에는 미틸라국을 다스리던 '마하데바(대천, 大天) 왕'의 일화가 전해진다. 막강한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던 왕은 어느 날 이발사에게 자신의 머리에 난 흰머리 한 가닥을 뽑게 한다. 왕은 손바닥에 놓인 그 은빛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깊은 사유에 잠긴다. 절대적인 권력도, 화려한 궁궐도 결국 세월 앞에서는 허망한 뜬구름일 뿐이며, 흰머리는 죽음의 신이 자신에게 보낸 전령임을 번쩍 깨달은 것이다. 진리를 구하기 위해 왕은 그 길로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숲으로 들어가 수행자가 되었다. 가장 무거운 권력을 훌훌 벗어던지는 순간, 비로소 영원한 자유와 지혜를 얻은 것이다.
움켜쥔 권력의 허망함에 대한 고뇌는 600여 년 전, 새로운 나라를 세운 늙은 왕의 굽은 어깨 위에도 짙게 서려 있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옥좌에 올랐으나, 태조 이성계가 늘그막에 마주한 것은 핏빛 비극이었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개국공신 정도전과 남은이 피살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아들들이 이방원(태종)의 칼날에 무참히 스러지는 '왕자의 난'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골육상쟁의 참극 앞에 절대 권력은 한낱 뜬구름보다 못했다.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에 깊은 환멸과 번뇌를 느낀 그는 옥좌를 팽개치듯 물려주고 태상왕이 되어, 자신의 왕사(王師)였던 무학(無學) 대사가 머물던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會巖寺)로 발길을 돌렸다. 마하데바 왕이 흰머리를 보고 숲으로 떠났듯, 이성계 역시 피 묻은 용포를 벗어던지고 회암사의 불경 소리에 기대어 남은 생의 참담함을 달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산 아래 자리했던 회암사는 200여 칸이 넘는 전각을 갖춘 거대한 사찰로, '천보산의 하늘 보배'라 불리며 고려와 초기 조선의 정신적 중심지였다. 태상왕 이성계는 회암사의 장엄한 불전 앞에서 자신이 쥔 권력이 갖는 한계와 삶의 덧없음을 깊이 고뇌했다. 사찰의 웅장함은 그의 거대한 힘을 비추는 거울인 동시에,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마침내 맑은 정신만이 남는다는 무상의 진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순야옹은 그 고뇌의 흔적을 사유하며 광활하게 펼쳐진 '회암사지(옛 절터)'를 먼저 걷는다. 세상을 호령하던 왕의 행차도, 화려했던 전각들도 이제는 텅 빈 터의 주춧돌로만 남아 옛 영화를 무언(無言)으로 증명하고 있다. 터를 지나 천보산 기슭으로 난 호젓한 길을 따라 800미터 남짓 오르면, 옛터의 적막함을 깨고 수행의 맥을 올곧게 잇고 있는 현재의 회암사가 단정한 자태를 드러낸다.
순야옹은 전각들을 지나 나옹선사의 부도탑과 무학대사비가 있는 산기슭의 나무 벤치에 자리를 잡고 배낭에서 보온통을 꺼낸다. 뜨거운 물이 표일배를 통과하며 진한 보이숙차를 우려낸다. 흑갈색 찻물이 잔을 채우는 동안, 문득 불교의 유명한 비유인 '안수정등(岸樹井藤)'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친다. 성난 코끼리에게 쫓기던 나그네가 낭떠러지 우물 속으로 피신해 칡넝쿨에 매달려 있다. 넝쿨은 흰쥐와 검은 쥐(낮과 밤)가 번갈아 갉아먹고, 발아래엔 독사들이 입을 벌리고 있다. 그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나그네는 머리 위 벌집에서 떨어지는 다섯 방울의 달콤한 꿀(오욕락)을 맛보며 죽음의 공포를 잊는다는 이야기다.
태조 이성계 역시 '절대 권력'이라는 꿀을 맛보았으나, 흰쥐와 검은 쥐가 갉아먹는 세월의 넝쿨 앞에서는 한낱 나그네에 불과했음을 옛 회암사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나옹과 무학이 태조에게 진정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그 달콤한 꿀이 아니라 넝쿨을 끊고 비상하는 지혜의 날개였으리라.
보이차 한 모금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가슴속 번뇌를 쓸어내린다. 벤치에 앉아 내려다보는 산 아래 옛터의 주춧돌은 권력의 무상함을 말해주지만, 내 등 뒤에 굳건히 서 있는 현재의 회암사 불경 소리는 영원한 진리를 속삭인다.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의 경계에서, 3월의 천보산 산바람이 찻잔 위를 맴돌며 낡은 집착을 비워내라 일러준다.
어리석은 사람은 '내 아들이다, 내 재산이다' 하며 괴로워한다.
나라는 존재조차 진실로 나의 것이 아닌데,
어찌 아들이 내 것이며 재산이 내 것이겠는가. (『법구경』 제5장 어리석은 사람의 품, 62게송)
[연재 안내]
'순야(純爺)의 갈색 사유'는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차 향기와 함께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길 위에서 만난 역사와 지혜의 문장이 당신의 주말을 포근하게 감싸 안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말,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차 한 잔 나누며 집착을 내려놓는 평온한 시간 보내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純爺(sunya)의 갈색 사유 4화 마곡사와 백범
https://brunch.co.kr/@29b9e2756369447/51
純爺(sunya)의 갈색 사유 3화 해인사 폭파
https://brunch.co.kr/@29b9e2756369447/46
純爺(sunya)의 갈색 사유 2화 재동(齋洞)의 밤
https://brunch.co.kr/@29b9e2756369447/34
純爺(sunya)의 갈색 사유 1화 국채보상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