純爺(sunya)의 갈색 사유
4화 마곡사와 백범

by 순야 착지

인당수에 던진 청춘, 시대의 눈을 뜨다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담은 본생담(本生譚) 중에는 진리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설산동자(雪山童子)'의 일화가 전해진다. 과거세에 설산에서 수행하던 동자는 어느 날 굶주린 나찰(귀신)로부터 진리의 절반을 듣게 된다. 동자가 나머지 절반을 마저 들려달라 청하자 나찰은 "배가 고파 말할 기력이 없으니 네 몸을 먹이로 주면 알려주겠다"고 답한다. 진리를 온전히 깨우칠 수만 있다면 육신이라는 껍데기는 연연할 것이 아니었다. 마침내 온전한 진리를 듣게 된 동자는, 그 깨달음의 문장을 바위와 나무에 깊이 새겨 뭇 생명들이 볼 수 있게 한 뒤 미련 없이 벼랑 아래로 몸을 던진다. 이것이 바로 법을 위해 몸을 버린다는 '위법사신(爲法捨身)'이다.

그런 위법사신의 역사가 66년 전 오늘, 대전의 거리에서 펼쳐졌다. 1960년 3월 8일, 3·15 부정선거의 먹구름이 온 나라를 덮으려 할 때였다. 대전고를 필두로 한 수천 명의 고등학생이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앞서 2월 28일 대구의 어린 학생들이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일어서라"고 외치며 뿌린 용기의 씨앗이 대전의 땅에서 뜨겁게 발아한 것이었다.

몽둥이와 최루탄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푸른 교복의 학생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들의 가장 빛나는 청춘을 역사의 벼랑 끝, 인당수에 기꺼이 던진 결단이었다. 대구에서 시작되어 대전으로 이어진 이 푸른 물결은 거침없이 남하하여 마산에 닿았다.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던 열일곱 살 학생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는 비극적인 뉴스는, 역설적이게도 온 국민의 잠든 양심을 흔들어 깨웠다. 가장 참혹한 희생이 차가운 바다를 뚫고 솟아올라 마침내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연꽃으로 만개한 것이다. 설산동자가 몸을 던져 세상에 진리를 남겼고, 세 도시 청년들의 숭고한 희생이 독재라는 짙은 안개에 갇혀 있던 이 땅의 민중들을 깨웠듯, 이들의 투신은 마침내 자유의 눈을 번쩍 뜨게 한 거룩한 공양미였다.

순야옹은 그 푸른 함성을 기억하며 충남 공주 마곡사(麻谷寺) '백범 명상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선다. 이곳은 백범 김구 선생이 나라 잃은 슬픔 속에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머리카락을 깎고 수행했던 곳이다.

순야옹은 발걸음을 옮겨 성보박물관 앞 다리에서 본당으로 향하는 다리 사이를 천천히 왕복하며 사색에 잠긴다. 발아래로는 마곡사를 태극 모양으로 휘감아 도는 태화천의 맑은 시냇물이 3월의 얼음을 깨고 쉼 없이 흘러가고 있다. 다리 한가운데 멈춰 서서 난간에 기대어 배낭 속 보온통을 열고 보이숙차를 찻잔에 따른다. 뜨거운 물이 찻잎을 깨우자 진한 갈색 향기가 봄바람에 실려 피어오른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맑은 물결과 찻잔 속에 담긴 묵직한 갈색 찻물이 묘하게 겹쳐진다. 이 짙은 찻물의 빛깔은 마치 심청이 몸을 던졌던 인당수의 깊은 바다색 같기도 하고, 김주열 열사를 품었던 마산의 바다 같기도 하다. 문득 전래동화 속 '심청'이 떠오른다. 그녀가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진 것은 죽기 위함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보게 하려는, 즉 '개안(開眼)'을 위한 지극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대전의 학생들이 거리에 뿌린 눈물과 땀방울 역시 우리 민족의 눈을 뜨게 한 공양미였다. 대구의 학생들이 던진 질문에 대전이 답했고, 마산의 바다가 온몸으로 증명했기에 우리는 마침내 4·19 혁명이라는 거대한 봄을 맞이할 수 있었다. 순야옹은 찻잔에 비친 자신의 눈동자를 보며 자문한다. 나는 오늘, 누군가의 눈을 뜨게 할 한 잔의 맑은 차가 되어 살고 있는가.

보이차 한 모금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준다.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마곡사 대웅보전의 낡은 기둥들이 견뎌온 세월이 오늘따라 유난히 당당해 보인다. 지켜야 할 가치를 위해 자신을 던진 이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마산 앞바다의 연꽃으로 피어나 영원히 우리 곁을 지키기 때문이다. 3월의 산바람이 차지만, 찻잔을 쥔 손끝에는 이미 민주주의라는 따스한 봄볕이 머물고 있다.


순야옹의 시(詩)

대구의 불꽃이 대전의 함성 되고

마산의 차가운 바다에서 연꽃으로 피었네.

인당수 거친 파도 속으로

청춘을 던진 것은 죽음이 아니었네.

보이차 진하게 우러나듯

그대들의 붉은 심장 녹아내려

이 땅의 눈먼 이들 마침내

자유의 눈을 번쩍 떴음이라.


[오늘의 법구경]

깨어 있는 사람은 죽지 않으나,

방황하며 게으른 사람은 이미 죽은 것과 같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깊이 깨달아

깨어 있음을 즐기고 성자의 경지에 머문다. (『법구경』 제2장 깨어 있음의 품, 21~22게송 중)


[연재 안내]

'순야(純爺)의 갈색 사유'는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차 향기와 함께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길 위에서 만난 역사와 지혜의 문장이 당신의 주말을 포근하게 감싸 안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말,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차 한 잔 나누며 서로의 눈을 맑게 비춰주는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앞 화의 내용]

純爺(sunya)의 갈색 사유 3화 해인사 폭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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