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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경 Jun 29. 2022

지상 최대의 거짓말, 그 진지함

공유지의 비극에 관한 일반오류

  만약 거지근성을 지닌 누군지가 있다면, 반드시 거지 같은 행동양식을 취하게 될 것이고 정신구조가 점진적으로 황폐해져 결국은 완전히 거지화 되고 말 것이다? 과연 이 논지명제가 참일까 거짓일까? 이것을 짚어  수 있는 논문이 있다. 이름하여, 그 유명한 '공유지의 비극'이다. (Garrett Hardin 1968, 'The Tragedy of the Commons') 이 논문은 과학저널인 Science지에 발표된 논문 치고는 그 분량이 수 페이지에 불과하건만, 이 논문의 피인용 횟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물론 다른 저자의 논문에 피인용된 것을 포함하여 과학, 사회, 문화, 역사를 통틀어 인문학 전반에 걸쳐 기고된 인용이나 논문에 내재한 문장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이 칼럼에서 또 한 번의 피인용을 더하여 보태는 꼴이 되려면, 논문의 내용을 소개해야 하므로 이를 간단히 옮겨 적자면, 이 논문의 논지이자 가설은 아래와 같다.

"모두에게 개방된 목초지가 있다면, 목동들이 자신의 사유지는 보전하고, 이 목초지에만 소를 방목해 곧 황폐해지고 말 것이다."

  앞서 언급한 거지근성의 정체를 묘사한 내용과 유사하여 얼핏 생각해보면 썩 그럴듯해 보이고, 한편으로는 뭐 그럴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지만 이 가설을 증명하려 전개하고 있는 논거에는 언어도단의 어지러운 함정과 아전인수격 판단이 적시되어 순전히 저자의 편견이자 오류 투성이 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의 피인용 횟수는 왜 그리도 많이 세상에 회자 되었을까? 깔끔하고 이유 있는 설득력 때문으로 판단한다. 지적하는바 두드러진 점은 강력한 설득력에 기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반대급부 측의 반박성향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하여튼 사회적 배경과 케케묵은 이데올로기의 이슈를 재소환 시킬만하여 식자층에 갑론을박의 단초를 제공하는 멋들어진 논문이다.

  법적으로 공유지(公有地)라 함은 어떤 시기에 공적 주체에서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의미하며, 통상 공유지는 국ㆍ공유지라고 표현한다. 말 그대로 국공유지의 뜻은 국유지와 공유지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국유지는 국유재산법에 의거하여, 공유지는 지방재정법에 의거하여 관리된다. 비록 모두에게 개방된 목초지라 할지라도 엄연히 소유권과 그 관리주체가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얘기이며, 사회적 배경에 따른 관리의 정도 차이는 다소 있을지언정 논문의 저자인 하딘의 생각처럼 함부로 황폐화할 여지는 거의 없다.

  이를 모를 리 없던 하딘의 오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도무지 하딘은 왜 저런 엉터리 같은 논거를 빼어 들었을까? 매우 간단하게도 그 결론은 공유지의 사유화에 있다. 적당한 분배에 근거한 적당한 사유화를 통하여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야만 목초지의 황폐화를 피할 수 있다는 엉터리 맥락이다. 맬서스의 인구론이 형편없는 착각이었던 것처럼 하딘 자신의 삐딱한 사시로 정확하게 주시한(?) 착각의 산물인 샘이다.

<공유 자원은 개활지나 목초지 같은 부동산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 번 되기가 어렵지 일단 되고 나면 어떻게든 먹고 산다는 거지의 얘기로 되돌아 가보자. 이 대목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대한민국거지연합 관계자 제위에게는 몹시 불편한 얘기임을 밝혀둔다. 아울러 거지근성을 언급함에 있어 제발 전국노숙자연맹은 제외시켜 달라는 이해관계자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에 거지근성을 해석하는 차원에서 노숙자는 제외시키기로 정하였음을 고지하는 바이다.

  항변의 이유는, 노숙자란 다만 주거지가 없을 뿐 노동력이 있으므로 빌어먹는 수단이나 형태가 거지와 달리 근본적인 차별성이 있기에 논외의 대상이라는 주장이 있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나 누구나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제, 어느 때고 졸지에 노숙자가 될 수 있다는 상시불확실어필하여 주장한 바 있었다. 그리고 잠을 청하는 장소가 공유지인 길바닥이나 대합실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저분하게 무노동으로 빌어먹는 거지와 동일시 함은 논리적 오류가 분명함지적하였 때문이다. (크억! 틀렸다... 지붕이 없는 공유지의 노숙이든, 지붕 덮인 거실이나 안방같은 공유지의 노숙이든 잠의 속성은 동등가이기 때문이다.)


  거지근성에 관한 한 완벽하게 정립된 개념이나 문헌정보는 없지만, 개략 다음에 나열하고 있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니 참 쓸데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다만 유머가 아니라서 별 재미는 없다.

- 근성 A (피동형) : 자기 의지를 상실하고, 조건 남의 도움에 기대어 적선합쇼 성향이 있거나, 매사에 있어 일을 주체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줄기차게 도움만을 요청하는 찌질한 상태를 비꼬는 말

- 근성 B (염치형) : 무엇이 되었거나 그저 얻어먹는 상황에 이골이 나있고, 공짜만을 기대하여 대가 없이 받는 행위를 당연시하는 기질을 이르는 말

- 근성 C (유아형) : 자신의 노력보다 더 큰 보상을 원하는 특성이나, 주는 것 없이(괜히 밉고?) 오로지 받은 것만당연히 생각하여 안 주면 깽판을 놓거나 땡깡을 부리는 기질을 일컫는 말


  과거에 발목이 잡혀 불투명한 미래가 두렵다면 남모르는 거지근성이 있음을 자백해야 하고, 오늘에 살고 있지 않다는 야멸찬 증거가 된다. 찰나의 연속에서 현재에 진솔하지 않으면 미래는 암울하겠지만, 문제는 거짓말이라는 점이다. 지상 최대의 거짓말은 '지금 여기에서 나는 진지하다'라는 착각으로 당초에 없는 고뇌를 만들며 사는 것이다. (셀라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스러운 순간은 죽음 이전까지 끝나지 않는 법. 내일을 믿지 말고 오늘에 살되, 이 시간, 이 자리, 여기에서 가볍고 헐겁게 그리하여 유머스럽게 살아야 할 일이다.

  그토록 진지하게 살았던 나는 허망하게 내일 죽을 수도 있고, 이후 사흘째는 화장터의 잿더미로 변하기 마련이다. 미안하게도 내가 보고 느끼는 나와, 남이 보고있는 나는 가히 충격적일 수 있다. 1895년 파리의 한 조간신문이 발행한 오보로 자신의 사망 부고기사를 접한 노벨(유언으로 노벨상을 창시한) 본인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지 감상해보자.


죽음의 상인 알프레드 노벨 박사 사망! 가장 빠른 방법으로 가장 잔인하게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발명하여 돈을 번 인물, 그가 어제 사망하다.


  잔을 듭시다!

  그리하여 진지함을 배제한 존재함에 경배하고, 이것이 그대와 내가 나누는 마지막 잔이 될 수 있음을 기뻐해야 할 일이요. 토끼도, 여우도, 사자도, 내일을 염려치 않고, 더구나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든 내일은 투명치 아니하며, 모래의 잔은 없을 수 있소. 자!  살루우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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