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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경 Jul 14. 2022

우아한 저속함에 대하여

천박한 우아함은 어떻고?

  어설피 나는 좆됐다  "I'm pretty much fucked" 어쩌고는 미국의 작가 앤디 위어의 SF 소설 '마션'의 첫 문장이다. 앤디 위어는 평범한 공대생 출신으로(사실은 칼택의 컴퓨터공학과를 다니다 말고 중퇴했다) 소설가가 되기 전에는 프로그래머로 일했고, 유명한 게임 워크래프트 개발에 참여하기도 한 코딩 실력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마션'은 로빈슨 크루소의 생존 이야기 마냥 그 무대를 지구로부터 14광분 거리의 화성으로 옮겨 놓은 사건으로, 15세기 작가 다니엘 디포가 썼던 로빈슨 크루소의 오마쥬에 불과하건만, 생각보다 공전의 히트를 쳐서 영화로 만들어져 대중들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어설피 나는 좆됐다는 문장은 내가 임의로 해석한 내용이지만, 이소설의 원문에 충실한 한글 번역자의 번역도 대동소이하여 원색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만약 도서출판 간행물윤리위원회의 통제가 지금까지 가동되고 있었다면? 이 서적은 심의를 통과할리 만무하지만 지금은 그런 암울한 시기가 아니다. 몇 년 전이지만 실제로 출간되어 서점가에 비치된 정발본 소설의 첫 세 문장의 번역은 이렇다.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I'm pretty much fucked. That's my considered opinion. Fucked.)"

  아무리 공대생 출신의 무식한 작가가 쓴 베스트셀러 소설 이라지만, 저토록 우아하게 저속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문장을 첫머리에 구사할 수 있는 강심장을 지닌 작가의 사상적 배경은 과연 저렴할까를 숙고해본다.

  욕지거리를 문장 첫머리에 구사하여 충격을 가하기 위한 모종의 수법 일지는 모르되, 서슴없이 골 때리는 서문은 비단 앤디 위어의 '마션'뿐만이 아니다. 이는 품위 있고 우아한 면모를 지닌 대문호의 소설 서문에도 종종 등장하는 고전적 수법이다.

소설 '마션' 한국어판 표지

  "사익스는 도적놈이고 페이긴은 장물아비, 소년은 소매치기이고 소녀는 창녀이다.(Sikes is a thief and Fagin is a fence, the boy is a pickpocket and the girl is a prostitute.)"

  이것은 영국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에 등장하는 서문이다. 첫 소절이 욕지거리나 적나라한 까발림이라면, 그것을 접하는 독자는 당황스럽지만 유추의 사슬을 꿰어서 나름대로 해석을 해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현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무엇을 다른 것과 비교하는 행위를 유추하다(analogizing)라고 정의하는데 어의를 뜯어보자면, 유추의 근본적 의미는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비슷한 물건'이라는 '아날로그'의 어미에 '이징'이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비슷한 물건을 나열하여 비교 선택하다'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법리적으로 유추는 금기의 영역이다. 유추된 법리의 해석은 부정이며 또한 불가하다는 뜻이다. 법리상 증거는 조작될 수 있건만, 가정을 전제한 논리적(또는 수리적) 증명은 조작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모든 증거의 합치로 밝혀진(진실이 아닌) 사실에 관하여, 법조계의 종사자들은 '증명'이라 하지 않고 어순을 뒤집어 '명증'이라는 어법을 사용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감의 애매한 유추는 때로 엄청난 오해를 불러오기도 한다. 더러 어감을 불어로 뉘앙스라 하는 경우가 있지만, Nuance라는 단어 자체가 엄밀하게는 어감이 아니다. 이 어감은 같은 상황일 망정 어휘의 포장지를 뭘 쓰느냐에 따라 결과가 급반전될 수도 있다. 조직 내에서 상급자가 비리를 저지르거나, 규정에 맞지 않는 행동을 시킬 때 책임의 소재를 피하기 위해 어감과 뉘앙스를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

  박정희 시절을 복기한 내용으로 알려진 남산의 어쩌고 라는 내용에 등장하는 해석불가의 뉘앙스가 있다. 증언에 하면 실제로 그렇게 표현한 적이 많았다고 전해지는 일화의 한마디는 다음과 같다.

  "임자! 그건 말이지... 임자가 알아서 해! 임자 뒤에는 내가 있지 않아?"

  자율권을 부여하듯 대충 알아서 하라는 이행의 지시건만, 글마를 적당히 혼내주라는 얘긴지, 쥐도새도 모르게 제거하라는 뜻인지, 반 병신으로 만들어 찍소리를 못하게 하라는 뜻인지, 설계의도가 애매하고 불순하여 도무지 알 수 없는 뉘앙스다. 알아서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수십 년 전의 파릇하던 젊은 시절에 겪은적이 있 에피소드를 통하여, 오도된 뉘앙스와 어이없게 유추된 헤프닝의 색다른 해석을 소개하자다음과 같다.

  유행이 한참 지나서,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물방울 무늬가 어지러운 원피스 차림에 늘어진 생머리를 손가락으로 빚어넘기며, 청진동 어디쯤에 위치한 건물 낭하의 계단식 벤치에 앉아, 우아한 자태로 커피를 마시던 그녀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공연히 주변을 쭈뼛거리던 나에게 맑은 눈동자를 지녔던 그녀는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나에게 묻기에 내가 우물쭈물 답하기를,

  "지금 내가 당신에게 말을 걸지 못한다면 몇십 년 후.."

  "......?"

  "아니,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내가 죽을 때 후회하고 말 거라는 겁니다."

  "호호... 그러니까, 제가 마음에 드신다 이거지요?"

  "그렇... 습..니다."

  "작업을 거는 수작이 영락없는 바람둥이 스타일 이로군요? 그래서, 말을 걸어 어쩌자는 얘긴데요?"

  ".........!"

  이건 막말이다. 물론 막말의 종류에는 독설, 악담, 폭언, 실언, 헛소리 따위가 있지만 그녀의 이 말이 독설인지, 악담인지, 폭언인지, 실언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 가던 순간이었다. 우아한 자태와 달리 괴리감이 느껴질만큼, 그래서 어쩌자는 얘기냐며 따지듯 되묻고 있는 그녀에게 나 역시 당황하여 잠시 망설였지만 서슴없이 이렇게 답하였다.

  "더럽게 예쁜 여자에게 말을 걸어보는 용기를 고민하던 참이었으니, 뭘 어찌 해보겠다는 사내의 의도라는 건 뻔하지 않겠습니까?"

  ".........?"

  내 대답의 뉘앙스를 파악하느라 그녀의 표정은 일순 복잡하게 변하여 곤혹스러움과 의아함이 교차하는 듯싶었다. 도대체 더러운건 뭐고 예쁜건 뭐냐? 어느 정도 예쁘면 더럽게 예쁠까를 해석하느라 당황해 보였고, 칭찬인지 욕인지 폭언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투로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이보세요, 순진한 아저씨! 미안하지만, 데이트 요청은 안돼요. 임자가 있거든요... 그리고 저 같은 스타일의 여자는 저쪽 골목의 자부동 집에 가면 널려 있답니다."


  예뻐도 지나칠 정도로 예쁘다는 내 말의 뉘앙스를 그녀는 바르게 해석을 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그것이 아름답고 우아한 그녀와 첫 대면이자 마지막 대면으로, 수십 년을 지나쳐 살아오면서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그녀와 마주치지 못하였다. 그때 서로 말을 주고받아서, 죽을 때 후회할 일이 없으니 그것으로 족하다는 판단은 과연 옳은 걸까?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수십 년을 함께 살았다면, 과연 행복하였을까? 로미오와 줄리엣이 비극이 아니라 희극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었다면 둘은 혹시 이혼하지 않았을까? 예끼! 순...


  우아한 천박함과, 천박한 우아함은 질적으로 차이가 있을거라 오해하겠지만, 어찌 유추하여 해석하던 자유이니 마음 내키는대로 해석을 해도 그만이다.

  저속함의 개념은 천박함이 아니기에 뉘앙스를 곡해할 이유가 없겠지만, 해석을 목적으로 두 단어를 천칭으로 계량해보는 허튼짓은 미친짓과 동일하다.

  존재의 이유 자체가 불분명하니, 우주가 사기(?)라는 현자의 한마디는 가끔 나를 멀뚱하게 만들기도 한다. 빌어먹을 언어의 치사한 뉘앙스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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