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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경 Jun 01. 2023

사랑과 신뢰라는 어설픈 함정

신빙성의 테러에 대하여

  한번쯤은 들어봤슴직한 단어 중에 '조건'이 있다. 모든 관계에는 분명한 조건이 선행한다.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내지, 필요충분조건 따위는 귀결을 맺는 두 명제 간에 성립하는 관계로, 필요조건은 전제적 개념에 가깝고, 충분조건은 결론적 개념에 가깝다. 물론 이런 해석은 교과서적 논리학의 개념을 준용한 풀이법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며, 순전히 사변(思辨) 임을 밝힌다. 여기에서 말하는 필요충분조건이란, 미리 전제하는 두 가지의 명제거짓이 아닌 참으로 결정된 조건으로부터 상황판단의 결론에 다다르는 선택지점으로 추론함이 타당하다.

   사랑과 신뢰의 필요충분조건을 만족하는 경우의 결혼일 망정 시효성이나 진부화의 변수를 설계수명에 대입하면, 결혼의 지속가능성은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이혼의 확률이 딱 그러하다.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심사숙고하여 그 귀결로 결혼을 작심하고 실행하였을 망정, 이혼으로 재귀될 가능성의 확률은 통계청의 이혼율 데이터정확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계는 과학적 소산일망정, 언제든 어느때건 조작이 가능하기에 늘상 가재미 눈으로 비스듬이 봐야한다.


  인간답게 살아가는 생활의 기반이 되는 직업이란 결혼을 위한 최소의 필요조건이지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다. 보유한 직업이 안정되건 혹은 아니건, 현금흐름의 안전한 수입원이 있어야만 안정된 공동체 생활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직업은 결혼의 충분조건으로 제시될 수 없다. 비록 직업을 가지고 있다한들 서로가 원하는 생활수준에 만족할 만큼의 보장된 수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콩깍지가 시야를 망가뜨리지 않는한, 현실적으로 욕심을 삭감하여 서로의 필요충분조건을 조율해야만 혼인계약은 성립된다.

  위에 언급한 필요충분조건을 만족하여 성립된 혼인의 관계라면 지속가능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겠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시간 효과에 따라 녹슬어가는 진부화 따위의 이상한 변수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결혼이 이혼으로 재귀(再歸)될 가능성의 문제는, 본시 없는 것을 있다고 믿고 있는 인간들이 제조한 추상명사와 형용사가 그 원흉이다. 다음에 제시하는 두 가지의 예를 살펴보자.


- 사랑이 식었다!

  실존적 차원의 해석으로는 대단히 엉터리다. 사랑이 세모인가? 네모인가? 어떤 냄새 거나? 본 적이 있거나? 만진 적이 있는가? 그게 뭔지 모르지만 덥히거나, 얼리거나, 더구나 식기까지 한다는 말인가?(예끼! 순... 메타포도 모르는가?) 인간적인 최선의 숭고한 가치를 추상명사인 사랑으로 배워온 폐해일 수 있다. 이해의 폭이 다른 성격 차이라거나, 기대와 전혀 다른 어떠한 이면에 절망을 하였다거나, 혹은 권태로 하여금 지치고 피곤한 나머지 싫증이 났다고 표현함이 타당하다.

  늘상 해가뜨고 날이가면 달이 기울듯, 일상은 변함없이 반복되는듯 보이건만 사실 변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살아있는 모든 객체나 심지어 주체인 당신마저...

  사랑이란 활화산 같은것, 한동안 폭발하듯 지표에 용암을 뿜어내고 맨틀 내부의 과압이 다하여 분출을 멈추게되면, 서서히 식어 또 언제 분출할지 알수없는 다음을 기약하고 휴지기로 되돌아가 쓸쓸한 휴화산으로 남는다. 그리하여 사랑이 식었다는 고매한 핑계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난이 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창으로 달아난다는 유대인의 속담과 같이, 전혀 다른 문제일 가능성도 있다. 식어가는 사랑이라는 모호한 표현은, 물론 정서적 결핍일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허기진 생활의 궁핍과 직결된 경제적 문제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 신뢰가 깨졌다!

  역시, 실존적인 문제의 해석으로는 말이 안 되는 우스운 변명이다. 신뢰란 깨질 수 있는 물질적 요소가 아니다. 믿음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이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배신이나 배반 따위는 생태계의 일상에 일반화되어 있으, 흥분할 사안은 아니다. 반작용의 여파당하지 않을 준비를 소홀히 한 탓도 다소 있을 것이다.


  부부란 일심동체라고 배웠거나, 그렇게 믿고 있는 어리석음의 단면이기도 하다. 부부는 당연히 이심이체이고 편향적 사랑과 달리 상호 존중이 기본이다. 그리하여 존중받으려거든 반드시 존중해야만 한다.


  추상명사인 사랑의 본질은 오로지 주는 것에 의미가 있을 뿐, 대응하여 받으려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이며, 곧 질투이자 에고이지 신뢰와는 무관하다. 받을것을 전제로 사랑했다면 반드시 불행을 자초한다. 뭔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거래일뿐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존적인 차원의 해석으로 신뢰의 무결성이나 배반의 상처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뢰가 파괴되었다면, 초기화로 간단히 해결이 가능하건만 어지간한 맨탈로는 쉽사리 복구가 불가능하다. 현상학적 재인식의 꾸준한 연습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토록 신뢰하던 나의 대상이 언제부터 존재하였고? 언제부터 내가 소유하였고? 배신의 늪에서 도저히 탈출이 불가한가?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해야만 사건의 지평선에서 필름 처음으로 돌려볼 수 있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학적 초기화는 연습이 되지 않으면 실행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거듭 언급커니와 절대로 쉽지않다.

  신뢰라는 벽돌은 생의 건축물에서 절대적이지 않고, 또 평생을 담보하지 않는다. 세월의 강물은 조용히 흐르지 않고 때로 범람하여 주변을 어지럽혀 배신을 일삼지만, 강가의 조약돌은 그렇지 아니하다. 차라리 조약돌을 신뢰함이 타당하건만, 그건 인간이 아닌 물질이기에 본질적으로 신뢰의 객체도 주체도 될수 없는 에 불과하다. 비록 생명체 일망정 지렁이나 강아지가 배신을 한적이 있는가? 사람이기에 배신을 하고, 배반을 당할 수 있다.


  결혼이 쉽다면, 이혼 또한 어렵지 않다. 누군지에게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었다? 이혼 역시 생의 여정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가벼운 선택지에 불과하다. 물론, 또 다른 누군지의 가치관으로는 상대적이자 필수적 요소일 경우도 있지만...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고린도전서 11장)


  엄밀히 계량 해보자면, 지속가능성 1% 미만인 '행복해지기 위하여...' 어쩌고는 쓸쓸한 추상명사적 형용어구에 불과하며, 착시로 인한 함정이 아닌지를 의심해야 할 것이다. 행복이라는 황홀경은 순간일뿐 잠시동안의 여운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나면, 다시 일상의 감옥에 재수감 되고야 만다. 러한 저울의 계량값을 체험한 일부 현자들은 신의 존재를 거부하며 머리를 깍고 구도자의 길을 택하기도 한다.


  좋든 싫든 평생을 배우자와 함께해야 한다는 반강제적이자, 문화적 음모인 결혼이라는 제도를 무조건 환영하지는 않는다. 여, 권태의 궤적을 이탈하여 이혼으로 재귀할 망정 손해는 없으니 한 번쯤은 결혼을 해보라는 권유를 추천할 따름이다. 적어도 먹지 못하는 썩은 사과를 권하는 것은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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