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은 평등심과 대비심으로 중생구제라는 자비행을 하게 된다.
수보리야, 보살의 지은 바 복덕은 응당 탐착하지 않음이니 이 까닭에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느니라
원효대사가 소성거사(小性居士)로 자칭하고 시중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거지 등 하층민들과 어울려 지내며 그 영혼들을 구제하였는데, 원효대사가 이들을 구제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하였는가?
그렇다면 원효대사가 원효대사가 아니고 불가의 초조(初祖)가 되지도 못했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생각이나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행(行)을 한다면 중생은 실로 구제되지 못한다.
왜 그런가?
그렇게 되면 보살은 보살 따로, 중생은 중생 따로 영원히 나뉘어져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생은 결코 부처가 되지 못한다.
단, 중생이 부처를 만났을 때만 부처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부처가 중생으로 내려와서 중생 속으로 들어가서 불성(佛性)을 끄집어내어 주기 때문이다.
불성은 스스로 꺼내지 못한다. 이미 어둠이 자기 존재 전체를 덮고 있고, 그 어둠이 자기 자신화 되어있기 때문이다. 어둠이 어떻게 불성을 끄집어내나?
이는 마치 항아리가 자기 스스로 자기 속에 든 물건을 끄집어내려는 것과 똑같다.
보살이 중생 속으로 들어가려면 일단 중생이 되어야만 된다.
중생의 마음이 보살 자기 마음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비심(大非心)이다.
그런데 중생을 구제한다는 생각을 가지면 이미 중생과 떨어지니 대비심이 아닌 것이다.
자기가 우월하고 잘난 상태에서 그 모습을 가지고 구제한다고 해봐야 별 볼 일 없다.
그러면 중생은 여전히 중생대로 남는다. 이전보다 좀 더 나은 중생은 되겠지만 그래봐야 여전히 중생이다.
그래서 대비심은 그 근본이 평등심(平等心)이 되어 있다.
평등심은 모든 중생을 포용하고 그 모든 중생과 자기 자신을 같은 위치에 두는 것이다. 그리고 중생이 자기 자리에 못 올라오니 자기가 중생과 같은 자리에 내려가고 그래서 그 중생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중생과 보살의 자리로 보살의 길을 따라 같이 올라가는 것이다.
보살은 평등심과 대비심(大悲心)을 바탕으로 중생구제라는 자비행(慈悲行)을 하게 된다.
여기에 중생구제를 한다는 생각이나 그 복덕이 붙을 자리가 어디 있는가?
자기가 여러분을 구제해 준다고 떠드는 사람은 사악한 악마 내지 어리석은 중생인 것이다.
원효대사는 거지와 어울릴 때는 진실로 거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후세에 빛나는 거지로 남았다.
보살이 복을 바란다는 것은 보살이 아직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