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불변하는 불성을 알려주셔서 우리는 영원한 행복을 알게 되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는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고 하면 이 사람은 내 설한 바 뜻을 알지 못함이라
달이 둥글었다가 반달이 되었다가 초승달이 되는 것이 달 그 자체가 실제로 변하는 모습인가?
우리들의 육안(肉眼)에 비치는 상(相)이 달라져 보이는 것일 뿐, 달 그 자체는 늘 둥글다.
태양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가 하는 것이 태양 그 자체가 변하는 모습인가?
구름이 끼고 안 끼고 안개가 끼고 안 끼고 하는 등의 변화에 따라 우리 육안에 비치는 모습이 달리 보일 뿐, 태양 그 자체는 늘 그대로이다.
그렇게 우리는 상(相)에 맺히는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또 그에 따른 마음 내지 감정을 내니 이는 자기 자신의 달과 태양을 찾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여래(如來)는 하늘의 태양이요, 달이다.
우리들 마음의 본래 모습은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이른바 청정심(淸淨心)이란 것이다.
영원히 변함없이 텅 비어있으니 온갖 종류의 마음들이 변화무쌍하게 생기거나 사라지거나 한다.
마치 허공(虛空)이 있으니 온갖 일기변화가 생기고 저마다의 상(相)을 가지게 되는 법이다.
여래(如來)는 청정심이요 허공이다.
오고 가고 앉고 눕고 한다는 것은 상(相)의 변하는 모습을 대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상(相)이 어떤 모습을 가지든 여래는 여래일 뿐 다른 존재가 아닌 것이다.
변화(變化)를 보면 변화의 법칙을 보고 또 다른 변화를 예측할 수 있을 뿐, 변화를 보고서 불변(不變)의 모습을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불변(不變)은 변화의 법칙 이전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변화의 법칙은 연기(緣起)로 존재하며, 인과법과 인연법을 이룬다.
여래는 본래 불변으로서 법신(法身)이다.
다만 중생구제를 위해서 화신(化身) 내지 응신(應身)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 몸은 오고 가고 앉고 눕고 하며 생겨나고 사라진다.
여래의 법신(法身)은 이 대우주에 충만하여 있으므로 여래가 오고 가고 앉고 눕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허공(虛空)이 그렇게 한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 된다.
우리 중생들 역시 변화하는 모습만 자기 존재로 생각한다면 최종적으로는 허무(虛無) 밖에 얻는 것이 없다.
그래서 허무를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고 온갖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서양역사이자 중생의 고통이기도 하다. 그럴수록 더욱 허무하고 우울해지기 마련이다.
다행히도 부처님께서 이 지구에 오셔서 불변하는 불성(佛性)을 일러주심으로써, 우리 역시 허무로부터 벗어나 진실로 영원한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