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심이 완전하게 갖추어지려면 상이 없어져야 한다.
수보리야, 또 과거 오백세 동안에 인욕선인이었던 일을 생각하니 그때의 세상에서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고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인욕바라밀이 얼마나 중요하면 석가모니불 과거세 시절의 대표적 이름을 인욕선인이라고 내세웠을까?
상(相)이 없었을 때 이름을 선인(仙人)이라고 붙였는데 그 내용은 부처라는 뜻이니 선인이나 부처나 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인욕바라밀을 하다 보면 점차 자비심이 갖추어져 가고 평등심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
밖으로 모든 존재를 나와 한 몸, 한 마음으로 바라봐야 인욕바라밀이 잘 되기 때문이다.
자비심을 완성시킨 존재가 바로 부처인데, 부처는 상이 없는 존재라, 그렇다면 자비심이 완전하게 갖추어지려면 상(相)이 없어져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우리가 자비심을 키우게 해달라고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는 것은 곧 내가 부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비를 함부로 이야기할 것은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자비를 우리 중생의 불순물이 조금 섞인 자비와 구별하여 대자대비(大慈大悲)라고 하는 것이다.
상(相)이 없으니 일체 평등심(平等心)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중생은 상(相)의 차별에 육근(六根)이 사로잡혀 평등심을 가지는데 한계가 있다. 인욕바라밀로 상(相)이 사라지니 평등심을 저절로 갖추게 된다.
그러면 불교에서 왜 부처와 보살, 아라한, 아나함, 사다함, 수다원, 중생 등의 차별화된 명칭과 다양한 경지의 용어를 사용하는가?
이들 각각의 존재를 차별심을 갖고 대하라는 뜻이 아니다. 마음으로는 평등심을 갖고 각각의 존재의 특성에서 나오는 것들에 대해 그에 잘 맞게 대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평등심 먼저 그 존재에 대해 잘 살피는 안목을 요구한다. 그것이 없이 무조건 평등심으로 대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어긋나게 되고 질서가 사라지고 오히려 혼란을 부른다.
따라서 평등심이란 정견(正見)과 지혜(智慧)가 갖추어져야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맹목적인 평등을 주장하는 특정 이데올로기는 사회를 침체 속에 빠뜨리는 것을 목격하지 않았는가?
중생은 차별상에만 매이고 수행자는 평등심에만 매여서 독특한 고통들을 초래한다.
이렇게 인욕바라밀은 자기 자신의 상(相)을 불꽃 속에서 녹여버리고 떨쳐서 자비와 평등이라는 불심(佛心)과 더욱 가까이 접하게 되고 따라서 그 속에 있던 연꽃을 사계절 활짝 피우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