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너무나 간절하게 찾거나 깨닫기를 원하면 오히려 중생심이 커진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일체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낼지니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고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도 마음을 내지 말고 응당 머문 바 없는 그 마음을 낼지니라
여기서 여래께서는 발심(發心)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낼진대, 색성향미촉법을 비롯한 일체상(一切相)을 떠나서 어디에도 머무르지 말고 이 마음을 내라고 하고 있다.
그럼 싯다르타가 사문유관(四門遊觀)을 통하여 발심하여 출가를 결심한 것은 어인 까닭인가?
동서남북 사문 밖의 병자(病者)와 노인과 사자(死者)를 보고 또한 북문에서는 출가자를 보고 출가를 결심했다고 하는데, 다른 것은 그렇다 치고 싯다르타가 마침 본 출가자가 초라한 행색에 비해 뭔가 맑고 거룩한 서기(瑞氣)를 내뿜고 있지 않았다면 과연 싯다르타가 출가할 마음이 생겨났겠는가?
수많은 제자들의 발심(發心)과 출가(出家)는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주를 한 몸에 구현하고 있는 석가모니의 위대한 영력(靈力)과 대덕(大德)에 감화되어 쇠붙이가 자석에 끌리듯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발심하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색성향미촉법을 떠나 성(聖)스러운 것을 따로 찾는 것이 되는 법이다.
그럼 성(聖)을 좋아하고 속(俗)을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성(聖)을 찾는다고 선인(仙人)이나 부처가 되거나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聖)과 속(俗)을 분별하고 호오심(好惡心)을 가진 중생에 머무르는 것이다. 단지 관심의 대상과 방향이 달라진 것뿐이다.
또한 성(聖)을 내 부처 또는 내 본래면목 등의 용어로 여기고 속(俗)을 내 중생심 또는 내 탐진치로 여기게 되어 아직 중생으로서 수행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의식이 잠재의식에서 강하게 생긴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부정적 인식에 따른 지나친 긴장과 스트레스, 자기 자신에 대한 왜곡된 의식 등을 가지게 되고 거기에 당연히 마장(魔障)이 끼어들게 되어 오히려 속인으로서의 자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있는 채 더욱 망가지게 된다. 그러면 망가진 자기 자신이 어찌 올바로 수행이 되겠는가? 불가능하다.
이것은 진정한 발심과 출가가 아니다.
상(相)을 떠나거나 버리는 마음 역시 상(相)으로 인해 생기는 마음이므로 상(相)에 머무르는 마음일 뿐이다.
진리를 너무나 간절하게 찾거나 깨닫기를 너무나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자기가 그만큼 아상 등을 비롯한 중생심이 강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길 필요까지는 없지만 최소한 자기의 상(相)을 중립화시켜 놓는 것이 올바른 발심(發心)이다.
그것이 상(相)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머물지 않는 것도 아니며 상을 떠나지도 않고 상에 매이지도 않고 오히려 자유롭게 되어 길을 잘 간다.
머무는 바 없는 발심(發心)이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면서 상(相)을 떠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相)의 본래 속성이 공(空)함을 스스로 체득해 가며 확인해 가는 것이다.
나 역시 속세를 떠난 적도 없고 안 떠난 적도 없이 발심하고 살아왔다.
상(相)을 가진 자기와 상(相)을 떠난 자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발심하면 그 순간 지옥으로 향한다.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역시 상(相)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相)과 더불어 하면서 상(相)의 본질을 처절하게 깨달아가는 것이다. 인욕선인(忍辱仙人) 역시 그렇게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