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불 과거세에 죽임을 당한 것은 상에 대한 집착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내가 옛적 가리왕에게 신체를 낱낱이 잘릴 때에 나는 그때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고 중생상이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왜냐하면 내가 옛적에 마디마디 사지를 베일 때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다면 응당 성내고 원망함을 내었으리라
과거세에 석가모니불께서 가리왕이란 극악무도한 왕을 만나 왕비들이 예배를 드리자 질투심에 사로잡혀 신체절단을 당한 경험을 가지고 또 상(相) 이 없는 세계를 보여주신다.
이 당시 석가모니불께서는 아상 등을 비롯한 사상(四相)이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이 당시 석가모니불은 이미 부처가 되어 부처로서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일체상(一切相)을 떠난 존재가 불(佛)이니까 말이다.
그럼 금생에 싯다르타로 나와 출가하여 수행한 것은 무슨 뜻인가?
우주령(宇宙靈)인 불령(佛靈)이 이 지구에 와서 몸을 가지고 태어날 때부터 부처로서 태어나 이후 모든 것은 우리에게 일체 시범을 보여주신 것이라.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태어날 때 외친 말씀이 바로 이 내용이다. 태어날 때 시방삼세를 손바닥 손금 보듯이 훤히 다 보고 알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부처가 왜 한낱 중생에 불과한 일개 왕에게 그럼 비참한 죽임을 당했는가?
신통력을 조금만 부려도 왕이 그 자리에서 벌벌 떨게 만들 수도 있는데 말이다.
오백명의 불한당이 한 번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그 자리에서 굴복되어 순식간에 성자(聖者)로 화(化)하게 하는 대우주신(大宇宙神) 인분인데 말이다.
바로 상(相)에 대한 집착이 없으므로 역으로 말하면 상(相)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의 질서를 완전히 존중하고 그대로 따른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가리왕이라는 상(相)이 선인(仙人)의 색신(色身)을 토막 내는 것을 굳이 신통력으로 막고 혼내지 않는다. 정 귀찮으면 자리를 피해 버리든가 아니면 이 세계의 색신을 이 기회에 벗으려고 그냥 그대로 당하든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력한 줄 알면 큰 오산이다. 한 번 움직이면 우주가 따라 움직이니까 말이다.
그럼 사상(四相)이 있다면 어떤 의식이 떠오를까?
아상(我相)은 거룩한 성인이 된 나에게 감히 이렇게 하다니 생각하며 억울하고 원통하여 화가 극도로 나는 것이고, 인상(人相)은 가리왕 저놈은 나의 불구대천지원수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고, 중생상(衆生相)은 내가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생각이고, 수자상(壽者相)은 내 인생이 이제 끝이로구나 하는 생각이다.
너무나 거룩해서 왕비들이 예배드렸다는 이유만으로 정말 억울한 토막살인을 당하면서 이 모든 중생의식이 없다니 진정 부처가 아닌가?
업장이 완전 소멸되어 상(相)이 없는 성인(聖人)이 되어도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세계이다. 너무 거룩해도 안 되는 세상이니 얼마나 무서운가? 이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부지런히 긁어모으고 있는 것을 보면 인생이 한 편이 코미디라 아니할 수 없다.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은 이러한 차원에 비하면 완전하지 않은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원수를 만들어 놓고 또다시 용서하려고 하는 것은 더 많은 인위적인 노력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용서가 안되면 복수하면서 악업의 굴레에 말려 들어가든가 아니면 자기를 스스로 해치고 고통의 바닷속에 자기 자신을 빠뜨리고 만다. 용서하면 자기는 우월한 존재가 되고 상대방은 열등한 존재가 되는 차별이 또 생기고 그럼으로써 또 투쟁이 일어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인 원수와 원수를 만들어놓고 자기 자신과 또 사랑하려는 자기 자신을 셋으로 나누어 싸움을 붙이니 마음의 평화는 점점 멀어지는 것이다.
처음부터 원수라는 것이 없어야 되는 것이다.
상(相)이 있으면 내면의 평화는 없고 평화가 없으면 상(相)이 없게 된다. 평화와 상(相), 이 둘은 빛과 어둠처럼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모든 인류가 진정한 평화공존을 원하면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어 있고, 그래서 그렇게 된다.
그전에 이렇게 부처님을 만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내 안의 부처도 이제 만나볼 때가 되었다. 벌써 2,500여 년이 지났다.
여기서 인욕선인과 우리의 서산대사(西山大師)님을 자비(慈悲)라는 측면에서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서산대사님은 왜구가 우리를 도륙하기 위해서 침략해 왔을 때 승병을 일으켜 왜구들을 참살했던 부처님이시다.
이 역시 인욕선인이 처했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상황이다.
그런데 두 부처님이 전혀 상반된 행위를 하셨다.
서산대사님은 왜구를 죽임으로써 서산대사님과 휘하 승병들이 살생을 직접 범하도록 하였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 어느 것이 더 진리에 부합되는 행(行)일까?
인욕선인은 죽은 후 원한령이 되어 복수할 분도 아니고, 서산대사님 역시 살생의 과보로 지옥에 떨어질 분도 아니다. 이미 두 분 다 부처님이 된 분들이기 때문이다.
서산대사님은 왜구가 무고한 살생을 함으로써 장차 받게 될 크나큰 과보를 미연에 없애주고 그로 인해 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스님으로써 가장 큰 악업을 스스로 당신께서 받으시는 것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살생은 우주적인 차원에서 정당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인욕선인은 이때 가리왕이 살생을 범하는 악업을 짓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아하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그 자리에서 죽음을 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가리왕이 큰 악업을 짓게 함으로써 나중에 크게 참회하고 거듭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택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포악한 인간이라도 그 영혼이 대성자(大聖者)를 그렇게 죽여놓고서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고 시간이 지날수록 두렵고 후회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따지자면 가리왕을 깨우치기 위해 가리왕에게 직접 몸을 보시하신 것이다.
그래서 자비의 측면에서 보면 두 분 다 당신들의 온몸을 내던져 똑같이 베푼 것이다.
자비는 극에 달하면 자기 자신과 타인의 금생의 목숨 따위는 부차적인 것이 되듯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것이고 그 마음과 지혜의 깊이는 끝이 없다. 세상의 보편적인 선악(善惡)의 관념 정도로는 절대로 이해되지 못한다. 이런 분들의 자비행은 우주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겨우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구체적인 자비행(慈悲行)은 대상과 상황에 따라 동일한 상황에서도 이와 같이 정반대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 자비심은 한결같이 동일하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베푸시는 대자대비는 우리의 인식으로는 도저히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피를 받았다고 생각되거든 마냥 좋아하고 감사만 할 것이 아니라 깊이깊이 여러 가지를 고려해봐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마음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