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경영하는 금강경 season3(13.이상적멸분7)

제일바라밀은 자기 자신의 상을 깨뜨리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이름이다.

by 하이붓다 지공선사

하이고 수보리 여래 설 제일바라밀 즉비제일바라밀 시명 제일바라밀

(何以故 須菩提 如來 說 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 第一波羅蜜)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제일바라밀이 제일바라밀이 아님일세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이니라


여래가 설한 것이 왜 으뜸인 제일바라밀인가?


<나>라는 존재의 근본이 본래 텅 비어 있으면서 모든 것이 들어차 있음을 설했으니 제일바라밀이고, 대우주의 모든 존재가 나와 근본이 같음을 설했으니 제일바라밀이고, 모든 존재가 본래 부처라는 이름의 신(神) 임을 설했으니 제일바라밀이고, 모든 존재가 각자 완전하면서도 전체와 또 하나가 되어있음을 설했으니 제일바라밀이고, 또한 상(相)으로 나타난 차별상(差別相)과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관계를 근본에서 설했으니 제일바라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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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 제일바라밀이 왜 제일바라밀이 아닌가?


제일바라밀이라고 하면 제이(第二), 제삼(第三)의 바라밀이 나오게 된다.


무엇이 제일이고 무엇이 제이, 제삼인가?


그런 것은 본래 없다.


우리가 따지는 제일, 제이, 제삼 등은 우리의 상(相)에서 나오는 분별의식일 뿐이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나>라는 존재는 윤회하면서 제일(第一)에 속할 때도 있고 제이(第二)에 속할 때도 있고 제삼(第三)에 속할 때도 있다. 아니 꼴찌에 속할 때도 있다.


그렇게 소속이 달라질 때마다 또는 진리를 차별하여 받아들일 때마다 <나>라는 존재는 달라지지 않는다. 단지 달라졌다는 허망한 분별망상을 가지는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옷을 다르게 입었다고 내 몸속이 달라지지 않는 것과 똑같다. 옷을 입으면 시간이 지나면 때가 묻는다. 그렇다면 그때도 나 자신인가? 옷을 나 자신이라고 받아들이려면 그에 묻은 때도 마땅히 받아들여야 논리에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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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쁜 옷만 구하고 그에 당연히 따르는 때나 얼룩은 싫어하고 거부하니 고(苦)가 마음속에서 끊이지 않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나 자신을 제일바라밀이라는 곳에 따로 소속되어 있거나 나를 떠나 따로 있는 진리라고 받아들인다면 제일바라밀이 꼴찌바라밀이 되어버리고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영원히 잃어버린다.


그래서 이 지구상에 오셔서 최고의 설법을 펼치면서도 그것이 제일바라밀이 아니라고 자상하게 깨우쳐주신다.


모든 것을 나 자신과 따로 또 다르게 볼까 봐 노심초사하신다. 대자대비다.


'부처님이 제일이다'라는 생각은 부처님과 자기 자신을 모독하는 것임을 여기서 엿본다.


부처님이 설한 제일바라밀은 자기 자신의 상(相)을 깨뜨리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이름이다.


또한 여기서 제일바라밀을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로 받아들인다면 보시바라밀이야말로 자기 부처를 찾고 삼천대천세계가 자기의 것이 되고 자기 존재의 찬란한 꽃을 이 대우주에 활짝 피우는 것이 되니 보시바라밀이 당연히 제일바라밀이라고 하시는 것이며, 또한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가장 첫 번째로 초석을 다지는 것이 된다는 뜻으로 제일바라밀로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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