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경영하는 금강경 season3(12.이상적멸분6)

자기 자성불에 대한 완전한 믿음이 있으면 금강경을 잘 받아들일 수 있다.

by 하이붓다 지공선사

불 고수보리 여시여시 약부유인 득문시경 불경불포불외 당지시인 심위희유

(佛 告須菩提 如是如是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警不怖不畏 當知是人 甚爲稀有)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렇다, 그렇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래지 않고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심히 희유함이 되느니라


인간은 어떤 경우에 놀라고 겁내고 두려워하길래 친히 여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한마디로 자기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 내지 한계(限界)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이 오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 돈타령을 하지만 정작 돈이 너무 많아도 자기 그릇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돈에 대해서는 누가 훔쳐가지 않을까 또는 누가 돈 때문에 나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본능적으로 생긴다. 죽음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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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두려움에 의해 정작 자기 존재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자기 영혼이 망가져가는 것이다.


불교에서 많은 소유(所有)를 바람직하지 않게 여기는 이유가 소유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가 망가질 만큼 많은 소유는 바로 이런 큰 장애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마음이 자기 외모를 감당하지 못해도 마찬가지로 자기 외모에 자기 영혼이 끌려다니며 여러 가지 고통을 일으킨다. 자기 외모에 따르는 여러 현상들을 자기 마음 내지 자기 영혼이 철저히 다스릴 수 있어야 예쁜 외모이든 못생긴 외모이든 관계없이 외모가 인생에 가치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절 살림살이도 마찬가지이다. 절에 들어오는 많은 시주금을 스님이 감당할 수 있으면 여러모로 자리이타(自利利他)에 큰 도움이 되고 중이 감당하지 못하면 자기 존재가 타락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마음이 휘둘릴 정도 이상의 시주금은 마땅히 받지 말아야 무사하다.


지금 전국의 사찰에 대불(大佛)을 짓고 있지만 그 대불을 모시면서 감당하려면 자기가 최소한 아라한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서 불상(佛像)만 크게 조성해 놓으면 그 큰 불상에 중들과 신도들 마음과 영혼이 눌려버리고 만다. 대불을 모실 수 있는 스님이 별로 없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지, 대불 조성 자체가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성철스님 같은 경우는 잠실 롯데월드타워보다 더 큰 대불을 조성해도 아무 관계가 없다.


따라서 자기 소유의 한계를 알고 잘 지키는 것이 바로 분수(分數)를 알고 거기에 자족하는 것이 되고 그것이 바로 도(道)를 나아가는 데 있어 기본 의식이 되는 것이다.


용맹정진도 좋으나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과로현상을 일으키면 그래서 무척 해롭다. 수행에서의 지나친 과욕은 마장(魔障)을 불러오는 씨앗이 된다.


수행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여유(餘裕)가 그래서 필수덕목이다. 조급한 마음은 수행을 가로막는 가장 큰 중생심 가운데 하나이다. 시간의 굴레에 갇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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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자기 존재의 현실을 너무 앞서나가면 실존과 의식의 그 괴리로 인해 망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에서 악기의 줄을 타듯이 너무 느슨하게도 하지 말고 너무 팽팽하게도 하지 말고 중도(中道)를 잘 지키라고 경고하신 것이다.


물론 여유는 게으른 것 하고는 전혀 다르다. 자기 한계를 잘 지키면서 자기 한계를 조금씩 넘어서는 것이 바로 여유이다. 게으른 것은 자기 한계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손쉬운 노력을 하는 것이다.


대우주신(大宇宙神)인 석가모니불도 우리 중생을 위해서 깨달음에 6년이라는 시간의 여유를 자기 자신에게 주었다. 눈 감은 즉시 자리에서 찰나에 성불(成佛)할 수 있는 분이 말이다. 한없이 고통스러운 완벽한 수행이 6년 세월은 우리 중생을 위한 대자대비(大慈大悲)를 베푸는 시간이다. 여래는 이렇게 한다. 어찌 그 무한한 은혜를 갚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자기가 이해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경(經)을 들으면 저절로 놀라고 겁내고 두려움이 생기게 된다.


자기가 지금까지 알고 진리라고 믿어왔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함은 물론 자기가 무지(無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되는 상황이고 또 자기 존재 자체를 부숴가야 하니 어찌 마음이 편하고 용감해질 수 있겠는가? 여태 오랜 세월 잘난 듯이 그렇게 지내왔는데 말이다.


역으로 말하면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이 경을 받아들이고 지닐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이 사람은 사상(四相)이 없는 사람이 되니 희유한 것은 당연하다.


물론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만용(蠻勇)을 부리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만용이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르고 짖어대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만 빼고 여래와 타인은 모두 다 안다.


만용을 부리다 보면 그 만용에 자기 존재가 사로잡혀 과대망상을 가져야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 정신병원에 가야 되는 불쌍한 부처가 되고 만다.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바로 자기 자성불(自性佛)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 경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감동으로 수보리존자처럼 잘 받아들이고 지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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