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의 한계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수보리야, 오는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면 여래가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아서 모두가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되리라
석가모니불께서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성취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그 공덕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보살(菩薩)이 된다는 뜻이다.
보살은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우주의 주인이 된 존재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 어떤 것도 필요 없는 스스로 충만하게 된 존재라는 뜻이다. 그래서 고(苦)가 완전히 영원히 소멸된 존재이다.
존재(存在)와 행(行)과 과(果)는 이렇다.
보살이라는 존재가 되면 그 행은 머무는 바 없는 무주행(無住行)이 되고 그 과보는 무량무변한 공덕(功德)이 되는 것이다.
보살이라는 존재가 되지 못하면 그 행은 어떤 것에 머무는 유주행(有住行)이 되고 그 과보는 인과에 따른 한정된 공덕이 된다.
이른바 존재가 행(行)과 그 과(果)를 결정짓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를 떠난 행(行)은 있을 수 없고, 행(行)을 떠난 과(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보살은 상(相)이 없으므로 그 공덕 역시 무량무변한 것이 되지만 중생은 상(相)을 자기로 삼음으로써 그 공덕은 한계가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을 수지독송하여 자기를 깨우쳐 먼저 보살이 되어라는 것이고, 자연히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것은 보살에 따른 무량무변한 공덕을 가져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금강경을 천만번 수지독송하더라도 보살이 되지 못하면 그렇게 하는 공덕은 무량무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이 무량무변한 것이 되느냐 아니면 유한한 것이 되느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자비로운 말씀인가? 위대한 여래의 설법마저도 그 설법의 공덕이 나에게 달려있음에랴.
우리 모두 석가모니불의 금강경 설법 공덕을 무량무변한 것이 되도록 애쓰는 것이 바로 진정한 불자(佛子)일지니...
그러면 보살이 되지 못하면 보살의 흉내를 내는 보시행(行)은 큰 공덕을 가져다주지도 못하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석가모니불께서 수차례 이 경에서 언급하셨듯이 보시행을 무시하면 보살이 되기가 험난할뿐더러, 더구나 보살이 되어도 복(福) 없는 보살이 되어 중생들에게 복을 나눠주려고 해도 중생들은 받지 못하게 된다. 아니, 보살의 설법을 듣고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른바 보살이 중생들에게 갖는 의미가 많이 퇴색되는 것이다. 누구든 그런 보살은 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중생을 위하는 마음과 보시행(行)이 한없이 쌓여있지 않으면 깨달은 아라한은 될지언정 결코 보살은 되지 못한다. 아라한과 보살이 그 구성 성분(成分)은 똑같지만 내용물 덩어리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런데 만약 보시가 너무 골치 아프니까 나는 깨달은 아라한만 되고 만족하겠다는 생각을 하면 어떠한가?
그러면 이상하게도 아라한은커녕 초보성인(聖人)인 수다원도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의 절반은 타(他)와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불께서 자리이타(自利利他)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 이타(利他)를 빼면 반쪽밖에 남지 않는다.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이타(利他)의 힘을 무시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이타(利他)가 곧 자리(自利)가 되고 자리(自利)가 곧 이타(利他)가 되는 경비가 바로 보살이다. 이것이 바로 묘유(妙有)이자 실상(實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시행(布施行)은 곧 묘행(妙行)이고 묘행은 무주(無住) 라야 원만한 것이 된다.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란 말이 왜 나왔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