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경영하는 금강경 season4(17.구경무아분5)

나의 언어는 어느 차원에서 나오는 것인가?

by 하이붓다 지공선사

불언 여시 여시 수보리 실무유법 여래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佛言 如是 如是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니라


부처님이 수보리의 대답에 그렇다고 확인해 주신다. 그리고 그 내용을 다시 한번 반복해서 강조해 주신다. 수보리는 얼마나 기분이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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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앞에서와 같은 수보리존자의 대답이 과연 어디에서 나왔길래 그렇다고 하실까?


두 사람의 대답이 말로는 똑같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에게 '맞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틀렸다'고 하는 것이 선(禪)과 진리의 세계이다.


왜냐하면 언어의 소리에 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그 언어가 과연 두뇌, 즉 자기 생각 차원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자기 영혼 차원에서 나온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 차원에서만 나왔다면 그것은 그 진리가 진정으로 자기 것이 아니라 결국은 소멸되고 마는 자기 두뇌에 잠시 머무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禪)에서 활용하는 언어내용과 그 구조가 일반 언어와 전혀 다른 이유는 바로 영혼 차원에서, 나아가서는 불성(佛性)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수보리의 대답에 대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해 주시는 이유가 바로 그 대답이 수보리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서 나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처님이 그 대답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그렇지 않다고 하시며 또 다른 설법을 펼치실 것이다.


이것이 왜 그런가?


내가 있고 언어가 있는 것은 아직 나의 상(相)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생각이 아무리 진리이더라도 자기 자신과 별개로 있으므로 별 의미가 없고, 옳다거나 그르다는 평가도 별 의미 없게 된다.


문제는 자기 존재의 차원이 가장 중요하므로 그 진리가 자기에게 체화(體化) 되었는지가 중요할 뿐이고, 체화되었다면 진리와 자기가 둘이 아닌 것이 되므로 당연히 여시(如是)가 나오는 것이다.


두뇌에서 나오는 소리는 아무리 고상한 진리를 표방해도 시끄러운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가 비어있는 깡통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빈 깡통에는 금덩어리가 들어있든 아니면 돌덩어리가 들어있든지 간에 구르면 똑같이 시끄러운 소리가 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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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선지식(善知識)은 대답 그 자체의 내용이 아니라, 그 대답이 어느 차원에서 나오는 것인가를 더욱더 중요시할 뿐이다. 왜냐하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올바로 가르쳐주면 되지만, 그 대답이 나오는 차원은 자기 노력에 달린 것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옛날 법맥(法脈)을 이어온 대선사들은 모두 그러하였지만, 그런 대선사는 지금 멸종된 것 같다. 얕은 언어의 내용에 자기 존재가 휘둘리고 있다. 그것도 순수한 자기 생각이라면 조금은 봐줄 만하지만, 대개 주워들은 풍월(風月)일 뿐이다. 그것은 서당개 3년인 범부(凡夫)에 지나지 않는다.


임제(臨濟)가 할(喝)하고, 덕산(德山)이 몽둥이를 휘두른 이유를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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