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내 가족의 아부다비로의 이주가 결정되었다.
급작스러웠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첫째 아이에게 영어를 전혀 가르치지 않고 있었다.
모국어를 먼저 능통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말로서 한국을 떠나 아부다비로 가는 게 결정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학습지 교사를 집으로 불렀다.
파닉스 책도 사고 닥치는 대로 영어 프로그램을 틀어줬지만 내 딸들은 짜증만 낼 뿐 도통 영어를 배우지 못했다.
먼저 아부다비에 이주한 가족들에게 물어보니 일단 한국을 떠나 그곳에 도착하면 영어는 저절로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아부다비에 도착했다.
내가 꿈꾸던 곳이 아니었다.
우당탕탕 적응이 너무 힘들었다.
미국 학교에 2주간 다녔던 둘째가 매일 기절할 정도로 울었다.
영어는 그냥 되는 게 절대 아니었다.
자녀들에게 조금이라도 영어를 시켜서 이곳에 데려오지 않은 자신이 미웠다.
모든 게 낯설었다.
영어도 부족한 나에게 아랍어를 비롯한 문화적 다양성이 혼재한 그곳은 카오스 그 자체였다.
아부다비살이는 녹록지 않았다.
2019년 자녀들의 첫 여름방학을 앞두고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기침이 너무 심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4인 가족 비행기 삯이 많이 들어도 일단 한국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한국에 도착했다.
아빠 차를 타고 창밖을 내다봤다.
한국의 땅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저절로 물주는 호스 없이도 저리 잘 자라나 하고 한참을 신기해했다.
그 사이 나는 한국 밖에서 한국 안을 들여다보는 반 이방인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건강검진을 했다.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기침은 나았는데 다른 병은 자라는 중이었다.
둔탁한 방망이로 머리를 세게 맞은 것같이 멍하고 얼얼했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멋모르고 산 부동산들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이들은
다시 아부다비로 돌아가기 싫어했다.
내가 죄인이었다.
2020년 1월, 모든 것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건강도, 재정도, 멘탈도 어느 하나 정상인 것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도 닥쳤다. 외국 생활에서 코로나를 다 겪다니. 아부다비에서 지내던 한국 가족 중에 많은 수가 다시 한국으로 귀임했다. 아부다비에 남은 가족들도 한껏 몸을 사리고 죽은 듯 조용히 지냈다. 모든 것이 문을 닫았다. 학교도 몰도 수영장도 놀이터도. 온라인 수업이 진행되었다. 아이들은 제대로 수업을 받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내가 딱히 나설 수도 없었다.
나 여기에 왜 왔지?
2020년 1월부터 아이들이 다니던 AIS 학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시간이 참 좋았다. 낯선 땅이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교사로서 영국 교육과정을 들여다보니 인사이트를 얻을 것이 무궁무진했다. 나는 많이 성장했다. 나의 가치관에도 많이 달라졌다. 코로나 기간에는 온라인으로 보충수업을 진행했다.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함께 했다. 그렇게 풍성한 경험들이 나를 유연하고 넓어지게 했다.
2022년에는 주. UAE 한글학교 봉사활동도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주로 UAE에 거주하고 있지만 한국 부모님의 한인 가정의 자녀들이었다. 다양한 학생들이 있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아 한국어가 매우 서툰 학생에서 얼마 전 UAE에 도착해 한국어는 유창하지만 영어가 서툴러 자신감이 수축한 친구들까지 각양각색이었다. AIS와 한글학교에서의 봉사활동이 늘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AIS에서 일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늘 긴장감이 있었다. 이것은 아부다비살이 내내 매일 안고 있던 감정이다.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떠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 상당한 부담이었다. 하지만 그것만 제외한다면 내가 아부다비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에게 보여주고 가르쳐 주었던 포용과 관용은 이제 내 인생의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자 이제 그럼 달콤쌉싸름한 아부다비로의 여행을 떠나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