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한 통의 전화

때는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직 코로나가 전 세계를 마비시키기 전이다.

마스크를 쓴 사람을 보는 것이 흔치 않았고, 지겹도록 손을 소독하는 일도 없었고,

거리두기로 인해 마음이 멀어지는 일 따위는 없었던 시절.

햇살이 눈 부신 2018년의 5월 어느 날 아침. 37살의 나는 여느 날과 같이 집 나간 정신을 단단히 붙들어 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벌써 휴직 7년 차. 아이 둘을 돌본답시고 육아휴직으로 한 명당 3년씩 합 6년, 그리고 대학원에 다니며 공부한다고 또 1년 휴직을 내고 7년째 일을 쉬고 있었다.

그렇게 일을 오래 쉬면 살림을 더 야무지게 할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나는 본디 청소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다.

엄마는 나와 두 살 어린 여동생에게 각자의 방 정리를 하라고 시키셨다.

여동생은 물건들을 착착 분류해가며 가지런히 정리해 나갔고 곧 방이 깨끗해졌다.

반면에 나는 물건들을 우르르 바닥에 쏟아 놓고 하나씩 쳐다보며 어디에 넣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결국 아침에 시작한 청소는 해가 질 때까지 마무리하지 못했다.

내 방이 처음보다 더 어지러워진 것을 보고 엄마는 이해할 수 없다며 불같이 화를 내셨고,

나는 그 뒤로 더 청소가 싫어졌다.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자 살림 기술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퇴보했다.

퇴보했다기 보다는 더 어려운 과제가 되었다고나 할까?

아이도 돌봐야 하고, 집도 치워야 하고, 밥도 해야 하는 살림이 정말 어렵게 느껴졌다.

어떤 과제보다도 더 어려운 숙제였다.

소파에 드러누운 빨랫감들을 제때 개지 못했다.

나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다 개어 놓은 옷들이 다시 엉켜 한 몸이 되어도 애써 외면했다.

또 설거지통에 쌓인 그릇들이 탑이 되어 높이 솟아올라 천정에 닿을 기세여도 못 본 척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장난감을 제때 치우지 않아 모르고 밟고 지나가다 으악 비명을 지르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러나 어쩌다 아이들의 친구들 집에 초대받을 때면 한없이 초라해졌다. 사람 사는 집이 다 거기서 거기지 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나의 착각은 무참히 깨졌다. 어떻게 부엌 선반에는 아무것도 나와 있지 않지? 이곳은 호텔인가? 가정집인가? 형편없이 엉망인 우리 집이 떠올랐다. 우리 집은 실내 캠핑장인가? 당분간 아이들의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는 일은 없겠다. 딸들아, 미안하다. 나도 결혼 전에는 살림 말고 잘하는 게 있었는데. 휴직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집안일을 하는 것은 나의 부족함을 매일 마주해야 하는 벌을 받는 것 같았다. 그로 인해 나의 자존감도 바닥으로 추락 중이었었다. 거울로 나의 푸석한 얼굴을 들여 볼 때면 ‘이 추레한 여자는 누구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아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돌보는 일상의 간단한 일들도 나에겐 매번 ‘미션 임파서블’ 만큼 어려웠다. 나의 아침은 기대보다 짜증으로 시작되었다. ‘일어나라’를 노래로 만들어 메들리로 부르며 깨워도 아이들은 꽁꽁 얼어붙은 겨울나무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씻어라, 밥 먹어라, 하지 마라, 해라, 가라, 가지 마라’ 목이 쉬게 반복해도, 딸들은 나의 간곡한 부탁을 매번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저 하늘로 가볍게 툭툭 풍선 날려 보내듯 공중으로 흩뿌려버렸다. 나만 혼자 애가 닳아 자꾸만 가슴을 쳤다. 이마 사이 내 천(川) 글자가 날로 깊어졌다. 어쩌면 나는 휴직의 다른 이름인 두 배속으로 빨리 늙는 것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지러운 집과 후줄근한 내 모습과 제멋대로인 아이들. 내가 기대했던, 아름답고 우아한 휴직의 모습과 내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 행복이 두 배 세 배 될 거라는 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날 아침과 다름없이 발이 열 개라도 되는 듯이 동동거리고 있었다. 아이들을 준비시키는 아침 시간은 늘 분초를 쪼개어도 모자라다. 자칫하면 준비물을 잊어버리거나 방과 후에 있을 수업을 깜빡하게 된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다. 8살 첫째를 가까스로 등교 마감 5분 전에 사랑 가득 찬 레이저 눈빛을 쏘며 세이프! 교문 앞에 떨궈주고 이어 둘째도 30초에 진심을 가득 담아 뽀뽀 세례를 날리며 어린이집 현관으로 들여보냈다. 아이 둘이 썰물 밀려 나가듯 나의 해안에서 빠져나가자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오늘이 광복절인가? 얼씨구나 어깨춤이 절로 났다. 쉿! 아이들이 클 때까지 이건 비밀이다. 자유가 좋긴 좋구먼. 하지만 오늘은 나도 대학원 수업이 있는 날이다. 바람을 가르며 길천리 일대를 가로질러 차의 핸들을 해운대 방향으로 꺾으려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운전 중 전화는 반갑지 않다. 맞다. 아이들 아빠가 일주일간의 미국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다. 그는 아랍 에미레이트 (이하 UAE)의 아부다비에서 파견근무하고 계신 직장동료로부터 막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UAE지사에 자리가 났으니 그에게 지원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받았다고 했다. 그가 근무하는 원자력 발전소는 당시 한국 정부와 UAE 정부와의 사업체결로 UAE에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를 수출해 발전소를 막 짓고 있었다. 그곳에서 일할 인력을 한국 원자력 발전소에서 몇 년 단위의 파견근무 형태로 보내고 있었다. 주변에 파견으로 종종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쩐지 나의 일이 될 것 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길천리에서의 삶은 퍽 무난하고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도 대학원에서 영미문학 박사과정에 막 입학한 터였다.


하지만 나는 마음속 깊이 언제나 낯선 곳에서의 삶을 동경했다.


그렇기에 갑작스러운 남편의 전화는 사실 속으로는 무척 반가웠다. 나는 머릿속으로 ‘지화자’를 외치고 꽹과리를 쳤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덤덤한 척하려 애를 썼다. 태연한 척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운전대를 잡고 길천리에서 부산 대연동 대학원까지 가는 길은 차가 헬륨을 마신 듯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차가 길 위를 달리는지, 바다 위에 떠서 가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간신히 마음을 부여잡고 광안대교를 아슬아슬하게 건넜다. 그날 대학원의 수업내용은 지금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3화아부다비에서 내 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