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1
아침부터 분주했다. 어제 챙겨놓은 수영 가방에서 빼먹은 여성용 면도기와 속옷도 챙겨 넣었다. 지갑과 스마트폰까지 챙겨 넣고 비장하게 현관문을 나섰다. 재활용 처리장에 버리려고 문 앞에 두었던 상자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수영용품이 든 에코백의 적당한 무게감을 느끼며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오늘은 화요일인데?‘라는 현타가 왔다. 내가 수영장에 등록한 날은 월수금이었다.
상자를 재활용 처리장에 던져 넣고 돌아서며 헛웃음이 나왔다. ’ 미쳤나? 미친 거야 ‘라는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얼마나 수영장에 가고 싶었으면...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했을까. 사실 이번 달 수영강습은 지난 금요일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하필 금요일부터 아들이 감기 증상을 보이면서 혹시나 코로나19일 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선별 진료소에 가서 검사를 받고 수영장은 가질 못했다. 월요일은 개천절 대체공휴일이라 강습이 없다. 의도치 않게 수영강습이 연속 두 번 좌절되면서 나의 기대감은 애달음으로 변했다.
물이라면 질색을 하던 내가 허리 통증을 줄여보겠다고 수영을 선택했다. 한동안 만 보 걷기도 해 봤지만 좀 더 강력한 운동 효과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내 인생의 금기 같았던 ’ 물’에 도전했다. 바다 근처만 가도 물비린내와 출렁이는 파도를 보며 멀미를 하던 내가. 이렇게 락스 탄 물에 못 들어가서 안달복달하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실망감과 허탈함이 뒤섞인 채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갔다. 잠시 후, 나는 서둘러 노트북과 책을 챙겨 들고 다시 현관을 나섰다. 한 달 전, 근처 스터디 카페에 체험 신청을 해뒀던 게 떠오른 것이다.
갑자기 웬 스터디 카페인가 하겠지만 몇 년 전부터 매일 꾸준한 글쓰기 습관을 만들려는 시도를 해왔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처음에는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좌절되고, 다음에는 생각해둔 소재를 앞에 두고 글을 진행시키지 못해 흐지부지됐다. 누가 나한테 원고 청탁을 해서 마감을 앞둔 것도 아니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니다 보니 매번 작심삼일로 끝을 봤다. 그럼 그냥 안 쓰면 되는데 이상하게 자꾸 해야 할 것 같아서 포기는 안 되고, 그럼 열심히 하면 되는데 그럴 에너지는 부족하고. 이젠 이런 상황에 약이 오른다. 이런 게 오기인가? 그래서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로 하고 스터디 카페를 알아보게 됐다.
라떼 시절을 떠올리며 독서실 정도로 생각했는데 스터디 카페 현관을 통과하는 것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키오스크로 지문 등록을 하고 자리도 지정을 해야 했는데. 나는 사장님의 6시간 무료 쿠폰을 사용하는 체험객이었다. 키오스크와 한참 씨름을 하고 사장님과 통화를 한 후 어찌어찌 입장할 수 있었다. 내부는 상당히 쾌적하고 편안했다. 왜 진작에 오지 않았을까? 그냥 책상 하나를 빌리는 건데... 굳이 돈을 써가면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과 귀찮음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 데 한 달이 걸렸다.
낯선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노트북을 켜고 준비해 간 책을 펼쳤다. 마흔 넘은 여자들의 운동을 장려하는 ‘마녀 체력’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이 나오고 작가 강연회도 갔었는데... 정작 그때는 수영에 도전하지 못했었다. 그때 운동을 시작했더라면 지금은 좀 덜 아팠을까? 어쨌든 책장을 넘기면서 수영과 관련된 글을 먼저 골라 읽었다. 그런데 우연히 펼쳐진 페이지의 글을 읽다가 내 ‘충동‘의 원인을 발견했다. 그 글은 ’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글이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 먼 북소리‘ 책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었다.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집착, 난생처음 자발적으로 수영장에 등록한 일, 나만의 공간을 찾아 스터디 카페를 찾아 헤매는 나의 행동들은 오래전부터 들려오는 ’ 먼 북소리‘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에게도 이미 30대 중반부터 먼 북소리는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든 써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마흔을 넘어선 후부터는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시도해보고 싶다는 것... 멀리서 들려오던 북소리는 이제 귀 옆에서 울리고 있다. 안 하고는 배길 수 없는 지경까지 온 것이다. 안 하던 짓을 하고 싶어 못 견디는 나의 충동이 결국 내 안에서 들려오는 ’ 먼 북소리‘였다는 것. 그 발견에 안심이 된다. 이제 마음껏 딴짓을 해도 될 것 같다. 평화롭고 조용하던 나의 세계가 소란스러워지고 생기가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