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2 - 마흔 도전기
수영 강습 첫날. 아침부터 가랑비가 흩날리고 있었지만 궂은 날씨도 수영을 향한 나의 열의와 기대감을 꺾지는 못했다. 운동이 목적인 만큼 버스를 타는 건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어 30분을 걸어 수영장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낯선 공간에 들어설 때의 긴장감이 밀려온다. 데스크 직원에게 이용 안내를 듣고 탈의실로 향한다. 탈의실 입구를 반쯤 가린 커튼을 젖히는데 뻣뻣하고 단단한 감촉이 느껴진다. 낯선 장소에 혼자 놓이면 여러 모로 부담이 느껴지는데 첫 번째는 마흔의 나이에도 어린이처럼 서툴러진다는 점. 그리고 또 하나, 평소에는 무기력하던 감각이 작은 것 하나에도 생생히 반응한다는 것이다. 우물쭈물 락커에 옷을 넣고 수영용품을 챙겨 샤워실로 향한다. 샤워실 입구에 넓게 깔려 있는 수건을 밟는 순간 차가운 기운이 온몸에 퍼지며 소름이 돋는다. 샤워기 손잡이를 당기자 차가운 물이 쏟아진다. 움찔 뒤로 물러선다. 여기서도 우물쭈물 샤워를 하며 새 수영복을 입는다. 비누가 묻은 채로 수영복 입는 방법과 실리콘 수모 쓰는 법을 유튜브로 미리 공부해 와서 다행이라고 안도한다. 하지만 실리콘 수모는 잘 늘어나지 않아 빡빡했고 또 한 편으로 미끄러워서 쓰기 힘들다. 수모를 착용하고 나니 이마 주위를 압박하는 느낌이 조금 불편하다. 수경에 붙어 있는 보호 스티커를 떼어내고 머리에 쓴다. 휴. 이제야 준비가 끝났다.
락스 냄새가 진동할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수영장에선 이렇다 할 냄새의 자극이 없다. 아직 앞 시간 강습이 끝나지 않은 메인 풀장을 기웃거리다가 비어있는 유아 풀로 향한다. 천천히 발부터 담근다. 조금 차가운데 싶다가 이내 미지근한 느낌이 든다. 수영장 물이 북극의 얼음물 정도로 차갑더라도 굳건히 참아내겠다던 나의 결연한 의지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머쓱해하며 사라진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강사로 보이는 남자가 준비 체조를 시작한다. 어떤 안내나 설명도 없다. 그냥 따라 한다. 시작이다.
내가 등록한 수영 강습은 오전 11시. 레인 안에는 60대 이상으로 보이는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그 사이 젊은 남자 두 명과 30,40대로 보이는 여자 회원이 몇 명 섞여 있었다. 그중 처음 등록한 사람은 나를 포함해 여자 세 명. 여자 강사는 8개월을 쉬었다는 젊은 남자 회원에게 자유형을 해보라고 시켰다. 그리고 왜 11시 반을 등록했냐고 물었다. 남자 회원은 맞는 시간이 11시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강사는 “여긴 실버 반 느낌이 강해요. 9시나 10시 반으로 옮기는 게 좋으실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나의 선택이 옳았다. 나는 가열 차게 진도를 빼는 열혈 수영인들의 무리에 끼게 될까 봐 걱정했다. 실버 반에서 여유작작하며 느리게 느리게 배워보리라.
공식적으로 오늘이 수영 강습 두 번째 시간. 나는 첫 번째 시간에 참석하지 못했다. 다른 초급자분들은 이미 ‘음파’ 호흡법과 물에 뜨기를 배우신 것 같았다. 강사는 간단하게 음파 호흡법을 알려주고 사라졌다. 강습 시작 전, 나는 수경을 끼면 정말 물속이 잘 보일까 궁금해 물속에 머리를 넣었다가 곧바로 물 위로 솟구쳤다. 잊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수영을 망설였던 진짜 이유는 수영용품을 챙기고 수영복을 갈아입는 귀찮음보다 질식에 대한 공포, 물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는 걸. 아무리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이런 생존과 관련된 공포를 잊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로 마음이 덜컹했다. 하지만 어찌해볼 틈 없이 강사는 ‘음파’를 해보라고 시켰고 나는 또 그걸 성공적으로 해냈다. 불과 몇 분 전의 공포는 어디로 가고 나는 강사가 설명한 호흡법을 잘 수행하는데 몰두하며 음파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도 꽤나 재밌게. 이거 뭐지? 물에 대한 공포심보다 이 동작을 잘해서 강사한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가? 아니면 물 공포심은 무경험에서 오는 막연한 두려움이었던가? 막상 숨을 참고 물속에 들어가니 물속 상황이 너무 잘 보여 안심이 됐다. 물속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유물과 머리카락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좀 전에 강사와 대화를 나눈 젊은 남자의 털이 부숭부숭한 다리도 보였다. 투명하게 속이 들여다보이는 수영장 벽과 바닥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어항 안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소리도 빛도 굴절되고, 중력의 힘도 약해지는 곳. 여러 자극은 차단되고 먹먹한 조용함이 있는 세계. 그리고 물속에서 나는 좀 가벼웠다. 그렇게 물속 세계를 탐험한 나는 물속에서 깨어나는 새로운 감각을 얻은 것 같았다. 어딘가에서 힘을 얻어 탄생하는 슈퍼 히어로처럼.
어린 시절부터 세뇌되어 있던 물 공포증은 허무할 정도로 시시하게 꽁무니를 뺐다. 어쩌면 수영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갑작스럽게 다시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20대, 30대에는 하지 못했던 것 하나를 극복했다. 갈수록 할 수 없는 것이 늘어나는 40대의 처지로 보면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낯선 세계로 한 발 내밀었을 뿐인데 감각이 살아나고 내가 활동하는 세계가 확장된다. 지구 반대편으로 여행을 떠난 것처럼 오늘 하루는 낯섦으로 가득 찼다.
50분의 여행이 끝나고 나는 샤워실로 돌아와 있었다. 수영장 건물을 나설 때 어디선가 좋은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 향기는 나한테서 나고 있었다. 집에서 쓰던 제품과는 다른 샴푸와 린스, 바디 워시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내 머리카락과 몸에서 낯선 향기가 난다. 내가 낯설다. 그리고 낯선 내가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