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물 마시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음식을 제외하고 잔으로 마시는 물의 양만 생각해 보면...... 하루에 두 잔이 채 안 되는 것 같다. 아버지도 물을 잘 안 마시는 편이라 아버지를 닮아서 그렇다고 여태 생각해왔다. 그런데 최근 나 나름의 새로운 가설이 하나 떠올랐는데 그건 ’ 귀찮아서’라는 거다. 물 마시기 귀찮은 게 아니라 화장실에 자주 가는 게 귀찮은 거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곱씹을수록 대단한 발견을 한 것 같이 뿌듯하다. 화장실에 가는 건 정말 귀찮은 일이다. 이 정도면 게으름뱅이의 끝판왕인가?
22살 때 중국으로 배낭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처음 떠난 해외여행. 비행기도 아니고 배를 타고 천진항으로 들어가는 여행이었다. 20대답게 중국을 동쪽에서 시작해 남쪽과 서쪽을 거쳐 베이징으로 한 바퀴를 도는 일정이었다. 열흘이 조금 넘는 기간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고행을 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일정을 그렇게 짠 스스로가 미스터리다. 요즘 느끼지만 20대의 뇌 구조는 사춘기와 닮아 있는 것 같다. 사춘기에는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이 떨어진다고 하지 않나.
어쨌든 서쪽의 어느 지역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열차였는데 무려 13시간이 걸렸다. 2000년, 쿠션감이라곤 거의 느껴지지 않는 딱딱한 의자에 앉은 채로 13시간을 가야 한다니. 지금 같아서는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이라며 기차역에 드러누울 판이지만 그때는 가능했다. 2인 좌석이 마주 보고 있는 형태였는데 내 옆에는 ‘왕이’라는 여대생이 앉았다. 작은 키에 통통한 체구로 나의 서두른 중국어에도 친절하게 대답해주고 질문도 해주었다. 여행이 끝나고 몇 년 후 연락이 끊기기 전까지 이메일로 가끔 안부를 주고받았다.
왕이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특징이 있었는데. 차를 쉬지 않고 마신다는 거였다. 중국 사람들이 차를 자주 마신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왕유는 자신의 텀블러에 담긴 차를 꾸준히 마셨다. 다 마시면 뜨거운 물을 담아 또 마신다. 문제는 그렇게 차를 끊임없이 마시니 화장실도 그만큼 자주 가게 된다는 것. 왕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는데 나를 지나야 열차 통로로 나갈 수 있었다. 매번 나에게 미안해하며 화장실을 갔는데 거의 한 시간 간격으로 갔던 것 같다. 마주 보고 있던 중국인 아저씨도 화장실에 가는 왕이의 뒷모습을 보며 정말 차를 많이 마신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중국 사람도 인정한 왕이의 차 사랑은 결국 잦은 화장실 출입으로 이어졌고, 열차에서 내릴 때까지 한 번도 화장실에 가지 않은 나와는 정말 대조적이었다.
당시에도 나는 물을 잘 마시지 않았고, 중국 열차의 화장실을 경험하기엔 나의 상상력은 지나치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여행하는 동안 탔던 다른 열차에서 열차 통로에 아이의 소변을 누이는 모습이나 열차가 역에 정차했을 때 열차 창문 밖으로 일제히 사람들이 쓰레기를 던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그 무엇보다 중국의 열차 화장실을 마주하는 게 두려웠다. 게다가 20대의 튼튼한 방광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잘 버티던 내 몸이 최근에 신호를 보내왔다. 피부나 모발이 푸석해지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목 안이 가뭄에 논 갈라지는 것처럼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 자주 들었다. 물을 조금씩 자주 마셨더니 증상이 덜 해지긴 했다. 결국 물 마시는 양이 늘어나니 화장실에 가는 횟수가 늘었다. 아 귀찮다. 화장실에 가기 싫어 물을 마시지 않는다는 나의 합리적 의심과 가설은 이제 확신이 되었다. 물 마시기 뿐 아니라 나는 안 해도 될 일을 반복하게 되거나 업무에서 비효율적인 부분을 못 견뎌한다. 그 심리의 저변에는 ‘귀찮음’이 단단히 버티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한다. 귀찮은 걸 싫어하니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빨리 일을 끝내는 것에 관심이 많다. 게으름뱅이이기 때문에 얻게 된 장점이라며 내심 뿌듯하기도 하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중국의 여대생 왕이는 화장실에 자주 가는 게 귀찮지 않았을까? 연락이 된다면 솔직하게 물어보고 싶다. 수분 부족으로 메마른 피부가 된 나와 달리 왕이는 수분 가득 촉촉한 피부를 유지하고 있는지. 뭐 지금 알아봤자 아무 소용없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