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속 60대의 나는 지금과 다름없는 모습이다. 60대에도 40대의 ‘동안’(상대적으로 젊어 보이는 얼굴)을 유지한 아줌마 혹은 할머니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연주할 줄 안다. 동네 문화센터에 다니며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단에서 활동한다. 그리고 틈틈이 평범한 일상의 순간을 작은 스케치북에 편안하게 표현할 줄 안다. 일주일에 한 번 독서 모임에 참석해 사람들과 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도 나눈다. 그리고 물이라면 질색이지만 가끔 강원도의 해변에서 멋진 파도를 타며 서핑을 한다. 이따금 휴양지로 여행을 다니며 쉼을 즐긴다.
혼자 이런 상상을 할 때면 내밀한 행복을 느꼈다. 예순 살이 되면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빨리 환갑이 되고 싶었다. 그때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할 이유도 목적도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20년 후면 아이도 성인이 되어 한 사람의 몫을 하고 있을 테고, 아파트를 사느라 빌린 대출금 상환도 끝났을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소박한 끼니를 마련할 돈과 문화센터 회비를 낼 정도의 돈이면 충분할 것이다. 참, 빠진 것이 하나 있다. 하루에 3~4시간 정도 규칙적으로 일하며 약간의 수입을 얻는 것이다. 상상이 이루어진다면 나의 노년은 정말 완벽할 것이다. 내가 꿈꾸는 미래는 엄청난 성과를 내야 하는 일도, 큰돈이 필요한 일도 아니다. 그래서 실현 가능성이 높고 그래서 상상할 때마다 마음이 푸근해졌다.
얼마 전, 나의 이런 내밀한 즐거움에 의심을 품게 되는 순간이 왔다. 사실 나는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고, 그림을 그릴 줄도 모른다. 더욱이 물은 보고만 있어도 울렁거린다. 그런 내가 꿈꾸는 미래의 모습은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판타지 수준이다. 동네문화센터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다만 것이 나의 유일한 음악 경험이었고, 온라인 서점에서 우연히 할인 가격에 구입한 ‘제주 여행 드로잉 컬러링북’에 두어 번 물감을 칠해 본 것이 전부였다. 그 낯설고 짧은 경험이 아주 인상적이었나보다. 잘해서 전문 예술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닌 일. 단지 순수한 즐거움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일. 그냥 그림에 색칠하고, 바이올린을 만지며 노는 시간. 그 노는 즐거움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 아직 40대인데. 아직 젊은데 왜 60대를 꿈꾸고 있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그 상상에서 60대라는 나이 설정만 빼면 40대의 내 모습이 된다. ‘60대가 되면’이라는 상상이 사실은 지금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이 아닌가? 마음의 뻔한 속임수, 자기기만에 속다니. ‘지금은 아니고 먼 미래에. 예순 살쯤에는 이렇게 살아보면 어때? 그냥 부담 갖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봐.’라고 마음은 속삭였다. 앞으로 17년이나 지나야 다가올 예순 살의 일을 야박하게 거절할 필요는 없잖은가. 그래서 나는 그 상상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내 마음의 진심은 ‘지금 이렇게 살아보는 건 어때?’ 였다는 걸. ‘나 악기 배워보고 싶어. 그림도 좀 그리고 싶은데... 물은 무섭지만 강원도 양양에서 파도타기도 한 번 해보고 싶다.’ 이게 나의 진짜 마음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20대의 강철 체력과 30대의 뜨거운 열정이 지나간 40대는 김빠진 콜라 같다고 느꼈다.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서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되는 노년이 되기를 꿈꿨다. 그런데 그 이유가 어쩌면 내가 번 아웃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40대인데 60대의 삶을 희망처럼 꿈꾸고, 무기력이 일상이 되어 애써 불꽃을 일으킨 의욕조차 금세 사그라드는 것 같던 이유가. 내가 너무 지쳤기 때문이란 걸. 죄책감 없이, 당당하게 놀고먹는 60대를 상상하다가 불현듯 깨달은 것이다.
그 이후로는 상상 놀이를 하지 않게 됐다. 가끔 내 마음이 만들어냈던 그 달콤한 거짓말이 그립다. 그리고 가끔은 서운한 마음도 든다. 어쩐지 친한 친구 한 명을 멀리 떠나보낸 기분이랄까? 항상 밝고 명랑해서 함께 있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지고 즐거워지던 그런 친구. 내가 진짜 60대가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 친구와 닮아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