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흔 육아일기 08
어쩌다 지금 하고 있는 방송 프로그램의 100회 특집을 맡게 된 적이 있었다. 내 능력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내 차례였기 때문. 총 네 팀이 한 주씩 돌아가면서 방송을 제작하는 시스템인데 이 프로그램이 어느덧 100회를 맞이하면서 특집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특집 방송 한 달 전,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재빨리 스마트폰 달력을 확인했다. 당시 내가 준비하고 있던 방송 회차는 96회 차. 그럼 4주 뒤 100회 차는 내 순서였다. 두둥.
특집 준비를 위해 전체 회의가 소집됐다. 촬영을 나간 피디를 뺀 나머지 작가와 피디들이 모였다. 농부의 일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니 ‘농민사관학교’에서 농부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취재해보자는 의견, 대학생을 모집해 일손이 부족한 농가에 일명 ‘농활’(농촌봉사활동)을 보내자는 의견, 외국인으로 귀농한 사람을 찾아보자는 의견 등 여러 의견이 있었다. 함께 회의를 진행하긴 했지만 가장 절박하고 심각했던 사람은 담당 작가인 나였다. 결론은 지난 방송에서 반응이 좋았던 출연자 중 아이들이 있었던 집을 골라 시골 아이들의 밝고 명랑한 모습을 보여주는 구성으로 정해졌다. 사실 지난 방송 출연자를 다시 찾아가는 구성은 ‘세상에 이런 일이‘나 ’ 생활의 달인‘ 등 여러 프로그램에서 특집 때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방식이다. 무엇이든 오랫동안 변함없이 사랑받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이 구성은 베스트 출연자인 만큼 평균 이상의 시청률은 될 거라는 기대감과 함께 새롭고 특별한 아이템을 찾아야 한다는 피 말리는 부담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당시 재밌게 봤던 출연자의 최근 근황을 소개하며 시청자의 궁금증을 해소해줄 수도 있으니 들이는 수고에 비해 결과물은 좋은. 그야말로 가성비 갑인 불멸의 구성이라고 할까?
전체 구성이 정해지고 출연자 가족도 네 곳으로 추려졌다. 네 가족이 각기 다른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콘셉트로 특집 기획안을 작성했다. 특집이고 재밌어야 한다는 부담은 있었지만 진행은 순조로웠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나타났다. 기획안이 통과되고 구체적인 촬영 구성을 짜야하는 단계. 어떻게 하면 각 출연자의 특징을 한눈에 보여주면서도 인상적인 인트로(도입, 시작)가 될지 고민했다. 지난 방송에서 재밌었던 부분을 떠올리며 이 부분의 영상과 현장음(영상에서 나오는 출연자의 말)을 어디까지만 살린 다음, 현재의 모습을 이렇게 연결해서 보여주면 어떨까? 아직 촬영하지도 않은 출연자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 머릿속으로 한 편의 영화를 찍고 있었다. 그 놀이가 어찌나 재밌던지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상상을 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두근거림인가.
나는 올해로 18년째 방송작가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 번에 여러 프로그램을 맡아서 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는 작가는 아니다. 십여 년쯤 전, 아이를 출산한 이후로 바쁜 지상파 프로그램이나 생방송 프로그램은 포기했다. 가사와 육아를 함께 하며 밤샘이 잦은 방송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자연스럽게 일을 고르는 기준과 제한이 생겼다. 원고료는 적지만 출근을 자주 하지 않고 재택이 가능한 일이나 규칙적인 스케줄로 돌발 상황이 거의 없고 안정적인 일을 찾았다. 그런 방송은 대체로 잔잔하고 정보 전달에 집중하다 보니 아침이나 저녁에 방송되는 생방송 같은 생기발랄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또, 100회가 될 정도로 오래 이어지는 방송은 대대적인 개편을 하지 않는 한 비슷한 구성이 패턴처럼 자리 잡게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특집이니까 재밌게, 색다르게 구성해보라는 지시를 받게 된 것이다. ‘뭔가 새롭게 해 봐도 된다고? 정말?’ 십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세포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신선한 재료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요리사처럼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자기 계발서에 흔하게 보았던 ‘가슴 뛰는 일을 하라!’는 말을 떠올리며 ‘역시 나는 방송작가를 해야 할 사람이었어. 이렇게 가슴이 뛰다니...’라며 흐뭇해했다. 불 꺼진 어둠 속에서 혼자만의 영화관이 펼쳐졌다. 출연자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서너 편 찍고 나니 새벽 2시가 넘어있었다. 이제 그만 자야지 생각했는데. 어라?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는다. 요즘 말로 심장이 나댄다는 표현처럼 제어가 되질 않는 거다. 이거 뭐지? 나는 심각하게 흥분 상태인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내가 애를 쓰면 쓸수록 심장은 더욱 요동치듯 두근거렸다.
불과 십여 분 전까지만 해도 기분 좋은 설렘과 달콤한 떨림을 선사하던 두근거림은 걷잡을 수 없는 불안 증세로 다가왔다. 나의 감정이나 생각과는 달리 저 혼자 날뛰는 심장을 지켜보는 일은 너무 낯설고 두려웠다. 모든 것이 평온한 새벽 시간에 마치 100미터 전력 질주를 끝낸 사람처럼 심장이 마구 뛴다고 생각해보라. 낯선 느낌은 불편함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대로 멈추지 않으면 어쩌지? 순식간에 공포가 몰려왔다. 내가 의식하면 할수록 심장 박동은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았다. 이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심장이 멎어버리면 어쩌지? 공포의 시간이 얼마나 지나갔는지는 모르겠다. 두려움 속에 새우처럼 몸을 말고, 몸 밖으로 튀어나올 뜻 격렬하게 뛰는 심장에 손을 얹은 채 견디다 보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멀쩡하게 눈을 떴다는 웃기고 허무한 이야기. 이런 일장춘몽을 봤나.
특집은 내 상상만큼 화려하지 않았지만 무난하게 마무리되었다. 내가 들떠서 만들었던 영화는 상상일 뿐, 촬영 현장은 내 상상 밖의 현실이다. 하지만 잠시나마 내게 남아 있던 열정과 설렘을 발견한 것은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나 아직 안 죽었네.‘라고. 하지만 또 하나의 교훈도 얻었다. 마흔이 넘어 가슴 뛰는 일을 하면 가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설렘과 불안도 구분하지 못하는 융통성 없는 마흔의 심장이여. 앞으로도 잘 버텨주기를. 백세 장수는 아니더라도 팔십까지는 건강하게 살고 싶다. 나도 함부로 흥분하지 않을 테니...
# 에필로그
벌렁대는 가슴을 안고 잠든 다음 날 아침.
멀쩡해진 심장에 안도하며
“아 시발, 마음대로 흥분도 못 하겠네.”
(저 평소에 욕 잘하는 사람 아닙니다.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