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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뿐사뿐 걷기 Oct 24. 2021

애매한 사이

- 마흔 육아 일기 02

  일 년 동안 열리지 않던 카톡방이 울렸다. 00초등학교 6학년 동창방. 


"고 000님께서 별세하셨기에 아래와 같이 부고를 전해드립니다."


반장은 같은 반이었던 남자아이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알렸다. 지금은 아저씨, 아줌마가 되었지만 기억 속의 그 친구들은 영원히 ’남자아이‘ ’여자아이‘로 부르고 싶다. 한 번 반장은 영원한 반장 아닌가. 어쨌든 이제 마흔을 조금 넘긴 나이에 벌써 부모님이 돌아가신다고? 일 년 만에 듣는 소식치고는 무거워서 잠시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당사자인 남자아이는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자세한 소식은 나중에 알리겠다고 했단다. 반장은 지방 출장 중인데 집에 들렀다가 문상을 갈 예정이라고. 함께 갈 수 있는 친구들을 확인했다. 그 사이 다른 지역에서 살고있는 여자아이는 참석은 못해도 부의금을 보내겠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총 열 명의 인원이 들어있는 단톡방에서 부의금을 내겠다거나 문상을 가겠다는 친구는 다섯 명 정도. 나머지 사람들은 메시지를 읽었지만 딱히 답이 없다. 나도 한참을 대화창을 바라보기만 했다. 우물쭈물하는 마음이 불편해져 결국 대화창을 닫아버렸다. 


  한 마디로 우린 너무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고, 사 백 킬로미터 밖의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는 나는 앞으로도 동창생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사랑받았던 ’혜화동‘ 노래를 들으며 어린 시절의 그들과 나의 추억을 떠올리는 건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오늘 같은 경우 나는 부의금을 내야 할까? 부의금은 안 내고 애도의 뜻만 전하자니 어쩐지 민망하고 도리를 다 하지 못한 것 같은 죄책감도 든다. 친정도 다른 지역으로 이사한지 오래.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알리지 않을 생각이다. 먼 거리에 있는 친구들에게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다. 그것이 금전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마흔이 넘고 나니 소수지만 친한 사람과 안 친한 사람으로 확실히 나눠진다. 문제는 그 사이에 있는 나머지 다수의 관계인데 대체로 이런 애매한 사이다. 나의 인간 관계는 좁고 얕아서 아주 제한적이다. 프리랜서이자 초등학생 아들을 둔 주부라는 사회적 포지션이 주는 환경 때문이다. 현재 인간 관계의 가장 큰 테마는 학부모.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알게 된 동네 엄마들이 나의 사십 대를 함께 하고 있는 새 친구들이다. 그런데 이 관계 역시 파도를 타듯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한다. 아이와 같은 반이 되면 가까워졌다가 다른 반이 되면 조금 소원해지기도 하고, 아이들끼리 서로 험한 말을 하거나 치고받고 다툼이 일어나 몸이나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기면 엄마들 사이의 기류는 급속도로 냉각된다. 자식과 연관된 일이다보니 그게 원망이든, 미안함이든 명확하게 입장을 밝히기 힘든 찜찜한 감정의 도가니 속에서 애끓는 마음의 고초를 겪게 된다. 초1부터 이 아슬아슬한 관계의 파도타기를 3년 쯤 하고 나니 엄마들도 적당히 자신과 성향이 맞는 사람을 추려내며 애매한 관계에도 질서가 잡혔다. 

  

  그렇다고 본래의 '애매한' 관계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엄마들끼리 가끔 브런치를 하며 육아의 고단함을 서로 위로하고 교육 정보도 공유하지만 사생활까지 오픈하기엔 거리감이 있는 사이. 이런 애매한 사이 적당한 일상을 공유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중간에 그 애매한 선을 넘어서는 사건이 발생하면 어떤 선택을 강요받는다. 가까이 다가가야 할지 아니면 멀어져야 할지. 그런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날 것 같다. 


  가끔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의 결혼에 나는 축의금을 내야 할까? 남편을 포함한 가족 여행을 함께 가자는 지인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까?(남편끼리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라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의 입장을 표명한다는 것이 아직도 낯설고 난감하다. 나의 대응에 따라 너와 나의 사이는 이 정도쯤이야 라는 선을 긋는 것 같아서다. 당신은 나와 친한 사이이니 경조사를 다 챙기겠습니다. 혹은 당신과의 인연은 여기까지...처럼 관계가 명확한 경우는 많지 않다. 애매하지만 차를 한 잔 사는 것까지는 괜찮은 사이 혹은 밥을 한 번 사는 것까지는 괜찮은 사이 정도로 나름의 가이드라인이 서 있는 경우는 양반이다. 어쩌다 차 값도 더치페이를 해야할지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은 허둥지둥한다. 그냥 차 한 잔 정도는 내가 사도 되지 않을까? 하다가도 굳이 내가? 라는 생각 사이에서 무한 진자운동을 하다보면 머리에 진땀이 나는 것 같다. 어떤 이는 차 한 잔이 뭐라고... 하겠지만 고지식한 나는 그 한 번의 선택이 상대방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분명한 신호가 되기 때문에 가볍게 넘겨지지 않는다. 생각할 수록 참 피곤한 인생이다. 당신과 나는 여기까지니까 서로 지킵시다!! 라는 무언의 사인을 어떻게 하면 민망하지 않고 촌스럽지 않게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고 싶다. 마흔은 아직 어린 걸까? 아니 너무 옛날 사람이라 그런가? 나도 쿨 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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