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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Apr 23. 2022

그냥

그냥

  칠십을 바라보는 이웃이 있다. 오늘도 그분과 잠시 후 공판장에 과일을 사러 갈 계획이다. 근 일 년을 넘게 지내다 보니 시나브로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 그분의 모습을 보면 미래의 내 모습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나를 동네 뒷산 어귀에 있는 텃밭으로 인도하신 분이기도 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텃밭 구성원이 된 지 얼마간은 텃밭에서 움직이는 나의 동선을 일일이 지켜보는 보안 카메라 같은 행동을 하였었다. 텃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기도 하지만 처음이라 더 그랬었던 것 같다. 처음엔 몰랐는데 어느 정도 친해지자 그분이 먼저 내가 아침마다 뭘 했었는지를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를 날마다 말없이 지켜봤다는 것에 상당히 당혹스러웠지만 이내 그럴 수 있지 하면서 이해했다.


  자식을 모두 키우고 난 후의 전업주부의 모습은 이름 모를 사막 위에 홀로 남아 있는 기분일 것 같다. 황량한 모래 바람만 불고 동서남북 방향을 알 수 없는 상태 딱 그 상태가 아닐까 싶다. 그분의 유일한 사회생활은 텃밭이다. 본인도 우리와 다름없이 얼마간의 텃밭을 일구고 있을 뿐인데 가장 오래되었다는 이유 하나로 그곳의 질서를 세우는 통반장 역할을 자처하신다. 일 년 조금 넘은 내게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신다. 그분의 소개로 경작권을 사서 처음으로 내 소유의 농사를 지은 지라 잘 모른다. 그래서 그분이 하라는 대로 하고 있다. 대파 앗을 뿌려라 열무 씨앗을 뿌려라 시금치 씨앗을 뿌려라 거의 그분 없으면 아무것도 못할 것처럼 지금까지 지내 왔다.


   런데 간혹 넘치는 정보로 힘들 때도 있다. 근무시간이든 한밤중이든 본인이 봤을 때 좀 못 마땅한 텃밭 하는 이웃이 있으면 모두 내게 그 사례를 세세하게 설명을 한다. 어젯밤에도 유난히 많은 일들이 있었던 날이라 늦은 귀가를 하여 아주 늦은 저녁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본인이 받은 스트레스를 한참을 설명하였다. 좀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요즘은 한 마디씩 추임새 같은 말을 하곤 한다. 쏟아내는 사연을 다 듣고 웃으면서 "약간의 스트레스는 활력이 된다고 하던데요, 텃밭이 없었으면 어쩔 뻔하셨어요?"라고 했다. 예전에 없이 하고 싶은 얘기를 했다.


  본인 밭 위의 밭주인이 비닐 쓰레기며 온갖 생활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본인 밭으로 오게 만드니까 조금의 밭을 얻어주면서 내게 농사를 짓게 해주는 대신 산더미처럼 모아놓고 버리지 않은 쓰레기를 내게 치우게 하고 일 년이 지난 후 그 밭을 그만 짓게 했다. 풀을 뜯어라, 여기를 파라, 날마다 주문이 없는 날이 없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로 나를 조정하였다. 어느 날은 그분이 한마디 했다. 나보다 좀 오래된 사람은 뭘 하라고 하면 "네"하고 대답만 하고 안 하는데 나는 아무 말 없이 하라는 걸 다 한다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건 참 쉽지 않고 그냥 되는 게 없다. 쉽게 말해서 어디를 가든 공짜가 없다. 힐링 삼아 지은 텃밭의 풍경도 마냥 싱그럽지만은 않다.


  오늘 아침에도 다른 날처럼 그 텃밭엘 갔다. 일주일 전쯤 몇 개의 강낭콩이 싹이 났었다. 씨앗을 뿌렸던 것의 일할 정도의 새싹만 싹이 트고 안 트자 그분이 "날마다 비둘기가 씨앗을 다 주어먹었어요, 망을 덮었어야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런 강낭콩이 어제오늘 갑자기 거의 씨앗 뿌린 곳 모두 골고루 싹이 났다. 비둘기가 먹었으니 어쩌겠나 하는 생각으로 있다가 싹이 나니까 얼마나 반갑고 고맙던지 그들을 쓰다듬어 주고 싶어졌다. 그러면서 주변의 작은 풀들을 뽑아 줬다. 속으로 '너희들을 위해 풀을 뽑는다.'라고 말하면서 뽑았다. 그러나 금방 '강낭콩을 위해 선의로 풀을 뽑은 게 아니네.' 하는 생각이 들면서 결국은 나를 위한 거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살면서 진짜 순도 백 퍼센트 상대만을 위해 하는 행동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때 내 남편에게도 그냥 주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도 세월만큼 시들해졌다. 내가 순도 백 퍼센트 상대만을 위해 계속적으로 했던 경우는 내가 낳은 내 자식 셋에게만 했었던 것 같다.


  텃밭을 뒤로하고 터덜터덜 산을 오르는데 바람에 살랑살랑 연녹색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잎들에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아~, 좋구나!' 무릉도원이 부럽지 않았다. 세상사 공짜가 없다는 삭막한 생각을 하다가도 고마운 자연을 만나면 '뭘 더 바라느냐? 끝없이 주기만 하는 자연이 내 곁에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에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자연은 묵묵히 그들의 자리에서 우리들에게 그냥 준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니 그런 자연을 닮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기대)을 해본다. 나도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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