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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Sep 02. 2022

우군인지 적군인지

  뭐 그렇게까지 그럴 일인가?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위급한 상황에 더 많이 일어난다. 들키고 싶지 않은 속내를 몽땅 들키고야 마는 경우가 생겨버렸다. 아니 보고 싶지 않은 상황을 다 보았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양보 배려 덕망 인격 품격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열할 수 있는 모든 수식어들이 바람에 홀라당 모자가 버껴지고 날아가버리듯 그렇게 저 멀리 사라지는 경우가 생다. 무엇이 왜 우리들을 그렇게 만드는 걸까? 무엇을 지키기 위해 그러는 걸까? 순도 100%의 희생이 필요했다. 무엇을 지키려고 하기보다 내 전부를 버리려고 하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 어느 때도 아닌 지금, 바로 지금 내게 필요한 게 용기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감수해야 될 것들이 시시때때로 생긴다. 묵묵히 감래 하면서 고비고비를 넘는다. 어쩌면 내 전부를 내주지 않아서 생기는 부작용일 수도 있다. 내 전부? 또 그건 뭘까? 내 전부를 내줘야 할 것만 같은데 그러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번민에 쌓이게 되고 아~, 차라리 공기처럼 사라질 수만 있다면 그냥 그렇게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될 때도 있다. 사람다워야 한다는 무게를 무겁게 느끼면서 간혹 나, 이래도 되나?를 걸음걸음마다 생각하곤 할 때도 있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잘 살아가는 건 정말 쉽지 않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현실에서 필요한 게 있었다. 나이만 몽땅 먹어서 배가 빵빵하면 뭘 할 건가? 늙고 병든 내 엄마 한 분 제대로 건사할 수 있는 내가 아닌 현재의 나를 바라봐야 하는 게 현실이다. 안타깝다. 살면서 지금보다 더 나은 나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여러 번. 그때마다 난 나를 가뒀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뭘 또 그렇게 지키고 싶었었던지 나를 내 마음 밖으로 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 왜, 기회는 지나고 나서야 그게 기회였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걸까? 다 지나고 나서 현재의 본인을 자책하면 뭘 할 건가? 뀌지 않은 현실을 시 할 수밖에 별 방법이 없다.

 

  미안하다. 죄송합니다. 하면 끝인 건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미안, 죄송 그런 마음으로 위기를 스리 살짝 넘기겠다는 거 아닌가 말이다. 해주고 싶은데 못하는 스스로를 한탄하면 뭘 할 건가? 부모님께 뿐만 아니라 언젠가 내가 난 자식에게도 내 무능을 자책한 적이 있었다. 가지고 있는 재능을 갈고닦을 수 있는 기회를 못 갖게 해 준 부족한 부모인 나를 정면으로 마주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많이 안타까웠었고 미안했었다. 나라를 구하라는 것도 아니고 세계 평화를 실현시키라는 것도 아니다. 내 부모의 건강을 돌보고 내 자식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도우라는 것, 그것을 못하는 무능한 나를 나는 바라만 본다. 멀뚱멀뚱.


  알고 보면 부모, 자식만 돌보지 못한 것만도 아니다. 다름 아닌 나 자신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게 맞다. 살면서 난 나의 동선을 늘 차단했다. 다시 말해서 하고 싶은 걸 시원하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늘 돌다리를 두드리다가 말았다. 한 발 내딛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자식들에게는 간절히 바라는 건 꼭 이루어진다고 말하면서 난 나를 위해 간절히 바라는 거 자체를 막았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나의 한계를 마음속으로 선을 그었다. 내가 갖고 있는 잠재력의 50%는 썼을까? 나를 위한 나의 노력은 매번 80% 정도만 하고 나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그 결과 보기 안타깝게 사랑하는 부모, 자식을 마음껏 돌보지 못하는 나를 마주하게 되는 벌을 받고 있다.


  나는 누군가? 나는 왜 나를 더 성장시키지 못했을까? 마음은 그룹 총수라도 할 것만 같은데 결혼이란 관문으로 들어가서 경단녀가 된 후 다시 이 작은 직장에 몸을 담고 감사하고 행복해하면서 산다. 오늘도 관련 업무를 하는 상사에게 프로페셔널하다는 칭찬을 듣고 술에 만취한 사람처럼 달콤한 미소를 삼키면서 노곤한 몸을 이끌고 귀가했다. 내 민낯은 그런 거다. 마음만 몽글거리고 행동으로 도전하지 못한 거 그게 나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적어도 내 부모, 자식은 걱정 없이 건사할 것 같은 난데 부족함 투성이인 게 현실이다. 나를 꺾는 나, 다른 나를 기대할 수는 있을까? 이생에서. 언젠가는 나도 나의 적군이기보다 우군이고 싶다. 어도 나에게 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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