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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long Sep 07. 2022

귀뚜라미 소리가 정겹다.

가을, 잠

  나이가 들고부터 때를 놓치면 다시 잠을 청하기가 힘들다. 잠을 청할수록 더욱 맑아진다. 한참을 뒤척이다 차라리 그냥 눈을 뜨기로 하고 불을 켠다.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그 소리와 함께하고자 불을 켠다. 깊은 밤 귀뚜라미 소리가 정겹다.


  엊그제 직장 동료가 물었다. "가을이 오면 괜찮으세요?"그러자 난 이렇게 답했다. "네, 봄은 좀 들뜨고 설레지만 가을은 괜찮아요." "차분하고 다를 때보다 커피가 더 생각나고 그러긴 하죠." 하니 듣고 있던 그녀가 말했다."저는 가을이 좀 힘들어요." 힘들다는 가을이 깊은 밤엔 이미 도착해 있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 차가워지는 기온만큼 쓸쓸함이 밀려온다. 쓸쓸함 뿐이겠는가? 다채로운 색깔의 기분을 다 형언하기 힘들어서 그냥 쓸쓸하다고 뭉텅 그려 표현하고 말 뿐이다. 그러고 보면 괜찮지가 않은 사람의 마음을 이미 공감하고 있는 나는 말로만 괜찮다고 했던가 보다.


  쓸쓸함이 느껴질 땐 따뜻한 정이 그리워진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어린아이처럼 생사의 경계에 계신 엄마에게 얼마 전 벌이 쏘였었다고 울긋불긋 아직 가시지 않은 쏘인 자국을 내밀었다. 문병 갈 때마다 아무 표정 변화가 없던 엄마가 고개를 돌려가면서 내가 내민 벌쏘인 곳을 보셨다. 반가웠다. 의식이 또렷해지신 것 같아서 반갑고 기뻤다. 본능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엄마의 모정이 느껴졌다.


  사주팔자 보는 분도 짚어내며 초년에 고생이 많았다고 하는 것처럼 난 참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럼에도 난 아름다웠다고 느끼고 그렇게 추억한다. 힘들었을지언정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런 나를 제일 이해하기 힘든 건 나였다. 간혹 혹시 내가 나를 속이는 걸까? 하면서 의문을 품곤 했다.  동안 답을 찾을 수 없어서 나의 본심이 따로 있을 것만 같아 내 본심을 읽어내려고 애써보기도 했다.


  최근에야 스스로 미뤄 짐작하여 의문 품는 걸 멈출 수 있었다. 어릴 적 부모님과의 애착형성이 제대로 잘 이뤄졌으며 성장과정 중에도 충분한 정을 느꼈기에 제대로 된 단단한 심리 형성이 가능했었던 것 같다. 쉽게 말해서 부모님으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라고 말씀 한 번 한적 없지만 자식들을 위하는 마음을 느끼면서 자랐다. 그래서 이 나이 먹도록 외롭고 힘들 때면 부모님을 생각하며 견뎌내곤 하는 것 같다.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몸부림칠 때도 차가운 바람이 쓸쓸함을 안겨줄 때도 난 그때마다 따뜻한 누군가의 손길을 갈망한다. 나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품어줄 누군가를 찾다가 마지막엔 부모님을 떠올린다. 실제로는 그분들이 걱정할까 걱정되어 표현하지 못하면서도 그분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느낀다. 감사한 일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내 영혼의 방황을 잡아주며 품어주시는 부모님이 계신다는 건 말할 수 없이 감사한 일이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내가 그런 존재였으면 좋겠다.  


  어느새 동창이 밝아오고 있다. 여전히 귀뚜라미 소리는 정겹게 들려오고 있다. 계절이 바뀌면서 느껴지는 미세한 감정이든 삶의 현장에서 마주치는 부대낌이든 아픔은 불쑥불쑥 내 옆에 다가와 있지만 치유는 스스로 손을 내밀 때 해결되는 것 같다. 그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 수 없을 때는 켜켜이 쌓아온 보온 창고처럼 내 마음속에 저장되어 온 따뜻한 정을 꺼내서라도 고비고비를 잘 넘기면서 살아내야 하는 게 인생인 것 같다. 차가운 기운과 함께 다가온 외로움이든 그리움이든 쓴 커피를 달게 마시듯 마시면서 살아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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