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 long Aug 28. 2023

자녀교육-부모의 역할

교육, 조급증, 부모, 자식

  수많은 석학들의 논리 정연한 교육 서적이 차고 넘친다. 자녀교육에 관한 어느 교수의 강의도 물론 99.9% 수많은 석학들의 연구 서적을 축약하여 자녀교육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도 흡입하겠다는 의지가 불타오르는 학부모들을 향해 쏟아냈다. 물론 나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그 교수는 마지막에 0,1%도 안 되는 시간을 고3 수험생이 있는 본인 집의 풍경을 말했다. 부모방문을 열어두면 아이방이 보이는데 수험생 자녀의 방문도 열어두고 지낸다는 얘기였다. 십 년이 훌쩍 넘는 지금도 그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이론과 실제의 괴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다.


자식이 공부를 잘하려면 둘 중 한 가지는 해야 그 결실이 원하는 대로 이뤄진다. 하나는 모두의 바람, 아이 스스로 열과 성을 다해서 열심히 하는 경우, 다른 하나는 자식이 부모의 조언을 잘 따르는 경우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두 가지 모두 희망사항일 뿐 현실에서는 쉽지 않다.


부모로서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고민을 학업을 집중해야 할 시기에 많이 했던 경험이 있다. 부모의 조력의  비율에 대한 고민을 좀 많이 했었다. 큰아이는 매사 의욕적인 아이였기에 학업에 매진해야 했던 시기의 부모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많았었다. 성장하는 내내 그냥 아무 개입 없이 스스로 하도록 노터치 했더라면 어땠을까?를 고민고민했었다. 그런 고민은 둘째, 셋째 쭉 이어졌지만 셋째가 대학에 입학하자 그 무게감이 거의 제로가 되었다.


물론 팔십 노모가 육십 자녀에게 차조심하라고 당부한다고도 하니까 부모는 그 부모라는 이름 속에 자식걱정이 스며들어있다고 볼 수 니 무한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자식교육의 가장 밀도 높은 시기는 태아일 때부터 만 5세까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쉽게 말해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시기의 교육이 자녀의 평생을 좌우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란 생각이다. 물론 내 주장만이 아니라 어쩌다 둘째 셋째를 잉태하고 낳아 기를 시기에 유아교육을 전공하면서 배운지식이니 내 생각이라기보다 객관적인 거라고 말할 수 있겠다.


논리 정연한 객관적인 거 말고 실제 체험담을 말하자면 아이에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 감각적으로 충실했었다. 그 중요하다는 5세까지의 부모역할 중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걸 동서들한테 들려줬었다. 많이 안아주고 원 없이 사랑하고 아이가 그걸 찐으로 느끼도록 하라고 조언했었다.


5세 그 이후에도 객관적인 지식에 의해서라기보다 아주 원초적으로 감각에 의존해서 행동했었던 것 같다. '일관성' 그리고 '동행'이 내가 실천한 자녀교육의 핵심이었다.


아토피가 걱정되어 간식이든 주식이든 아이들이 먹는 음식은 거의 직접 만들어서 제공했다. 아이들의 옷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거의 손빨래를 했다. 그리고 아이 정서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날마다 아이 셋과 나란히 누워 책을 읽어주었다. 그것도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아이 셋 모두 중학교 졸업 때까지 매일 영어받았쓰기를 했었다. 학교생활 그리고 학원에서 있었던 일을 쉬는 틈에 이런저런 얘기를 꾸준히 나눴었다. 특히 학원을 보내는 걸로 부모역할을 다 했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다녀와서의 피드백이 공부의 질을 높이는 핵심이라고 생각했었던 거 같다.


요즘 자녀교육의 풍경은 알 수 없지만 다양한 콘텐츠가 발달되어 있고 부모들의 기본 소양도 탁월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룰 수 있는 꿈만 꿔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을 믿는 사람이다. 그런 맥락에서 부모로서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을 꿈처럼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부모니까. 그런 생각을 갖은 사람으로서 아이들을 향해 어떤 꿈을 꿨을까? 큰 테두리의 바람은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아이 셋 모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이 셋 모두 우리 자식으로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생각을 하는 부모다.


요즘 수국에 꽂혀서 수국 꽃꽂이를 많이 했다. 지난해에 꽃꽂이를 한 수국이 올해 꽃을 피웠다. 그 후 또 꽃꽂이를 해놓고 새싹이 돋기를 심하게 독촉을 한다. 제자리를 잡고 성장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라고 생각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화분 있는 곳을 오가면서 눈으로 독촉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을 기르면서 조급한 마음을 드러냈던 스스로를 떠올려보았다. 세종대왕의 업적을 읊듯이 아주 훌륭한 부모역할을 했다고 자부하는 읊조림을 했지만 알고 보면 조급증으로 아이들을 많이 힘들게 했던 부족한 엄마였다.


신이 바빠서 엄마를 보냈다고는 하나, 어찌 되었든 엄마는 신이 아닌 인간이었단 사실을 이해받고 싶다. 큰아이가 엄마의 사랑은 넘쳤다고 말했다. '정도가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음'의 뜻을 갖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도 있지만 어쨌든 엄마의 사랑을 넘치도록 느꼈다는 큰아이의 말에 위안을 삼는 여전히 바보 같은 엄마다. 정답은 없다는 말이 있다. 정답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부모와 자녀 사이엔 사랑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와 자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