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사십 년이 가까워지고 있다. 종갓집 종손이신 아버지는 시제를 다녀오시면 매번 조상님 뵐 낯이 없다고 한참을 넋두리를 하셨다. 대를 이을 아들을 못 낳으셨다는 이유로 고개를 못 들겠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종부이신 우리 엄마는 평생을 죄인처럼 아무 말씀을 못하시고 사셨다. 뿐만 아니라 삼 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제사를 모시며 사셨다.
우리 아버지의 걱정은 대를 이어 조상님 제사를 모실 아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돌아가셔도 제사를 지낼 아들이 없어서 제삿밥을 못 드실 거라고 걱정이셨다. 엄마가 병석에 계시기 직전까지는 지극정성으로 아버지의 제사를 모셨다. 엄마는 당신 식사도 어려우실 정도로 거동이 쉽지 않았으면서 조부모님 그리고 아버지 제사를 온 정성을 다하여 모셨다. 너무 힘드시니까 조부모님 제사는 작은아버지도 생존해 계시니까 작은댁에서 모시도록 하시라고 하면 "죽기 전까지는 내가 모실 거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모셨다.
건너마을에 사시는 작은아버지께서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우리 엄마는 작은아버지를 뵐 때마다 "나 죽으면 그다음에 돌아가셔요."라고 작은아버지께 부탁하시곤 하셨다. 엄마의 부탁을 들어드릴 수 없으셨던지 저세상 버스를 먼저 타셨다.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셨단 사실을 엄마는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모르겠다. 내일 찾아뵙게 될 텐데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다.
작은아버지 묘소를 조부모님 묘소가 있는 산에 꾸렸다. 장지에 먼저 도착해서 조부모님 산소를 찾아 인사를 드리고 묘비를 보았다. 무심하게 그냥 읽어 내려갔는데 조부모님의 손자이자 우리 사촌들의 이름이 가득 적혀있었다. 그러나 조부모님의 장자인 우리 부모님의 네 딸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 아버지의 그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아버지의 한탄이 계속될 때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네 딸들 중 누구라도 아들이었었더라면 우리 부모님은 얼마나 좋으셨을까, 특히 우리 아버지는 정말 말할 수 없이 희망차게 사셨을 텐데'라는 생각이 늘 들곤 했다. 시대가 그랬다. 지금 우리 세대는 딸이 부모와 소통을 많이 하고 자식으로서 친밀도가 더 많다는 이유로 아들보다 딸 낳기를 간절히 바라는 경향이 있다. '제사는 무슨 제사, 죽으면 그만이지.'라는 생각도 지배적인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 세대는 그분들 시각으로 이해하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
우리 아버지는 그래도 근 사십 년을 우리 엄마가 지극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셨다. 엄마가 병원에 계시게 되자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엄마가 집에 안 계시자 우리들의 친정이 없어졌다. 텅 빈 집은 그냥 무탈하게 잘 있는지 안부를 묻는 정도로 둘러보곤 한다. 엄마 없이 아버지 제사를 두 번 맞았다. 곧 세 번째가 돌아온다. 놀랍게도 큰언니가 제사에 가담을 안 했다. 물론 둘째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아버지의 걱정은 아들이 없어서 당신 제삿밥을 못 드실 거라는 게 큰 걱정이었는데 그런 아버지 제사에 참여를 안 하는 걸 당혹스러워하면서 셋째인 나 혼자 두 번의 제사를 모셨고 세 번째도 혼자 모실 것 같다.
간혹 산소를 돌보는 것도 제사를 지내는 것도 후손을 위한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의 경우는 당신들의 바람과 뜻을 받들어서 모시는 게 도리라는 생각이다. 하늘의 뜻이라 어찌할 수 없었겠지만 생전에 얼마나 간절하셨었는지 보아왔다. 그런 우리 아버지의 뜻을 외면할 수 없다. 얼마간이라도 자식으로서 정성으로 도리를 다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생과 사의 가운데에 계시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몇 해 후까지라도 제사를 모실 생각이다. 제사를 모시는 걸로 당최 언급을 안 하시던 우리 엄마는 몸소 조상을 모시는 걸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극 정성으로 모셨기에 뜻을 달리 물을 필요도 없다.
삶을 살아가면서 각종 기념일을 챙긴다. 관혼상제라는 네 가지 의례가 있다. 성인식을 하고 결혼식을 하고 장례식을 하고 제례를 한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 더 많은 정성을 들여 행한다. '제례가 뭐라고 죽으면 그만인 것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의 뜻을 헤아리고 뜻을 받드는 행위는 격식이나 예의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편리함이나 가치관 사상 뭐 그게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는 거다.
제례든 뭐든 내 부모님이 바라는 바라는 걸 알고도 모르는 척하면서 사는 건 그건 스스로가 사람이 아니라는 답을 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셋째가 아버지를 찾아뵈러 왔습니다. 내년에도 당신 셋째 사위와 함께 찾아뵙겠습니다."라고 하며 생전에 좋아하신 음식을 준비해 산소를 찾아서 제를 지냈다. 생전에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했던 기억이 없다. 막걸리 심부름을 자주 했던 기억은 있으나 손수 술을 따라드린 적도 없었다. 산소 앞에서 뒤늦은 술을 따르고 속으로만 '아버지, 그립습니다.'라고 생각한다. 그리움은 사랑의 다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