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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궁무진화 May 15. 2023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나의 존재 이유를 지켜준다.

문명의 충돌 속, <선택의 가능성들>의 이야기

타인의 입김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바람으로부터 내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한동안 나는 나와 같은 생각과 진로를 가진 사람들과만 어울리고 있었다.

글과 영상, 미디어와 마케팅, 문화와 콘텐츠에 대한 열정과 아이디어로 근 수년을 달렸고,

그렇게 이를 나의 업으로 삼게 되었다.


이쪽 업계의 보편적 페이는 높지 않다.

정확히는 능력 있는 소수의 감독과 이를 뒷받침하는 다수의 스테프들 간 페이의 격차가 크다.

또한 프로젝트의 흥행에 따른 인센티브 차이가 큰 분야이다.

러다 보니 흔히 '성공'을 위해 타인을 도와주는 수많은 스테프 중 하나가 아닌

성공을 주도하는 창작 디렉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 막 업계에 발을 들인 나는 갈길이 멀다.

하루하루 맡게 되는 일을 쳐내기도 바쁜 나에게 디렉터의 길은 점점 멀어 보였고

내가 맡는 작은 연출의 업무에서 창작의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의사 형들과 1박 2일간의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5명의 의사와 1명의 콘텐츠인. 문명의 충돌 내지 이방인의 초대와도 같아 보이는 모임은

실상 음주가무를 좋아하는 여섯 개인의 즐거움과 광란으로 점철된 술의 잔치로 막을 내렸다.

사회적 이름을 한 꺼풀 벗겨내면 결국 춤과 술을 좋아하는 인간일 뿐,

누구보다 순수하고 본성에 충실한 여행이었다.


피곤함에 찌든 몸을 경춘선에 싣고 오며 지난 새벽 술자리의 이야기를 복기했다.

그리곤 여러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군의관이기에 월 250밖에 받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한탄하는 형의 모습

 월 천씩은 손해 보는 봉사 중이라는 또 다른 형의 토로,

자신의 능력을 부정시키는 의무적인 군복무에 대한 불만,

누군가를 향한 사랑보다 우선되는 자신의 삶에 끼치는 연애와 결혼의 효용성,

자신이 오랜 기간 세운 공고한 성의 군주로서 구획을 지키는 삶.

다른 세계에 다른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들과의 조우는 내 머릿속에선 문명의 충돌이었다.


충돌의 여파일까, 나의 삶에 대한 흔들림이 밤까지 이어졌다.

내 삶이 이어져온 방향성과 이뤄온 작은 성과들 하나하나에 대한 의미가 조각나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믿고 이루어온 것들은 어떤 값어치가 있는 것일까'

'그것들은 나에게 어떤 효용성을 가져다준 것일까'

'과연 있기나 할까, 그저 객기였던 걸까'


이과인 5명에게 둘러싸여 풀려난 문과인은 카페에 앉아 해답을 찾다 결국 시집을 펼쳤다.

그리곤 지하철에서 읽고 한쪽 모서리를 접어둔 페이지를 펼쳤다.

바로 선택의 가능성들,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의 시.

..
시를 쓰지 않을 때의 어리석음보다
시를 쓸 때의 어리석음을 더 좋아한다.
..
너무 쉽게 믿는 친절보다
사려 깊은 친절을 더 좋아한다.
..
여기에 말한 많은 것들보다
여기에 말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좋아한다.
..
별들의 시간보다 벌레들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
..
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
모든 존재가 그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을 더 좋아한다.


- 선택의 가능성들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

<선택의 가능성들>이란 시를 읽고 나면

영화를 통해 삶 성찰하 시간을 사랑 지 어린 날 모습

직접 영상을 촬영하며 남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던 시간,

그 작품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며 느끼던 희열감,

그리고 가슴 뛰는 이야기를 만들어 세상에 가치를 전달하겠단 포부,

나에게 더 많은 돈을 쥐어주는 일보다

진심을 다할 수 있는 것을 좇겠다는 삶의 방향성,

먼저 결과를 재기보다 사랑하는 가치사람을 위해

나 자신을 조금 더 희생하겠다던 약속들이 떠오른다.


나는 무엇을 좀 더 좋아하는지, 그리고 나는 어떤 존재가치가 있는지를

누군가 자신의 인생을 담은 글귀를 통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명확해지면 타인의 외풍에도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문명인과의 조우는 언제나 신선하고 재미있지만
그만큼 넓어진 견문으로 두려움도 커진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늘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하지 못할 때 크게 드리워지는 것 같다.


조금 부족하고 아직 모자란 면도 많지만,

나는 내 일과 가치를 좇는 삶을 사랑한다.

여행과 성찰을 동시에 안겨준 경춘선 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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