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가치9_ 2015년 2월 14일
부모님과 28년간 살았던 집, 내 방. 책장 한쪽에서 먼지 쌓인 물건을 발견했다. 거뭇거뭇 잉크가 묻어 있는 펜촉들. 한때는 이것을 소모품처럼 사용하며 만화가라는 꿈을 키웠다.
펜촉 끝에 잉크를 묻혀 스케치 선 위에 짙은 선을 입힌다. 성질이 하도 까다로워서 힘을 많이 주면 종이가 긁혀 선이 번지고, 힘을 주지 않으면 선이 너무 얇아지거나 갈라져버리기도 한다. 한동안 쓰다 보면 끝이 무뎌지고 날렵한 맛이 사라져 수명을 다한다. 그 기간이 짧으면 하루, 길면 삼 일 정도. 언제부턴가 수명을 다한 펜촉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다 버린 줄 알았다. 그래서 더욱 반가운 발견. 나도 모르게 베시시 미소가 지어졌다.
웹툰이 대세인 요즘. 만화 그리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길 하면 아마 구식이라고, 무식하다고, 사서 고생을 한다고 할 것 같다. 그러나 그땐 ‘손맛’, ‘펜맛’ 같은 우리들끼만 아는 말들을 쓰면서 펜촉을 길들이기 위해 몇 달씩 선 연습을 했다. 비로소 선을 자유자제로 쓸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만화계로 입문하는 것이다. 모두가 다 그렇게 만화가가 되는 줄 알았다.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언니 중 한 명은 그때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시대가 이렇게 빨리 바뀔지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라며 후회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용기가 더 없어 더 열심히 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할 뿐이다.
참 길고 다사다난했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남은 건 한 줌 남짓, 쓸모를 다한 펜촉 딱 이만큼이 전부라니 다소 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득 펜촉이라는 도구는 그 시대이고, 그 시절에 무모하고 미련했던 나 자신같이 느껴졌다. 하나의 길, 하나의 방법 밖에 몰라 순수하게 몰입했던 나의 10대, 20대 초반 청춘 말이다.
그때의 꿈은 끝이 났지만, 쓸모를 다한 것은 아니다. 물론 손으로 갈고 닦은 역량은 이제 쓸 곳이 없다. 그러나 긴 시간 꿈을 길들이며 키워온 단단한 마음은 아직도 내게 유용한 존재다. 지금 나는 모양은 다르지만 속은 같은 꿈을 꾸고 있고 그때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더 잘 버티는 중이니까. 물론 펜촉처럼 성질이 하도 까다로워 다루기가 다소 어려운 마음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