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피어나고 있나요?

김준혁 <돌봄의 역설>

by 평온

집에서 나와 바로 앞, 중학교 돌담을 따라 한 바퀴 빙 돌면 일터에 도착한다. 왼쪽으로는 용담 해안길. 하늘과 바다가 매일 파랑의 명도와 채도를 달리하며 맞닿아 있다. 똑같은 자리, 똑같은 생활의 반복일진대, 그래도 새로운 날의 시작이라는 걸 잊지 말라는 듯 어제와는 또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조용하지만 단단한 바다의 가르침에 나는 칠판을 바라보는 성실한 학생마냥 바다를 응시하며 걷는다.

오른쪽으로는 학교 담장을 따라 나무가 무성하다. 어제와 다르게 쑥 자란 풀들에 새삼 놀라기도 하고, 반가운 친구와 수다떨 듯 명랑하게 울고 있는 새들이 대체 어디에 있나 고개를 들고 찾아 보기도 하는, 기분 좋은 산책을 겸한 출근길이다.

지난 봄, 참여 중이던 프로그램에서 인상적인 풍경을 찍어 오라는 숙제를 받았다. 아직껏 숙제 먼저 하고 놀던 모범생 기질이 남아있어, 걷는 내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부터 땅 그림자까지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 학교 담에 노오랗게 별딱지처럼 다닥다닥 피어난 개나리를 발견했다. 아기 보듯 기특하게, 애틋하게 바라보며 사진을 찍어댔다.

그러다 멈칫! “네가 개나리라고?”
무대에 선 배우처럼 나를 놀래킨 개나리를 보며 독백을 날렸다. 내가 나무나 꽃에 대해 무지한 생태맹인건 인정한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일년 365일, 그 중 주말을 제외하고 그 길을 걸어다닌 지 3년이 다 되어가는데 그게 개나리나무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꽃을 보고서야 개나리 나무란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냥 다 같은 나무인 줄 알았던 나. 나무는 꽃을 피움으로써 ‘나는 개나리랍니다’라며 자기의 존재를 나에게 알려 주었다.


피어난다는 것은 이런 게 아닐까?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것, 그러기 위해 뿌리에서부터 끌어올린 생명력을 다해 ‘팝’하고 피어나는 것.

존재를 알아 차린다는 것은 무게가 있는 일이다, 이제 나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이전의 스침을 미안해 하며, 그의 안녕과 강건함을 살피는 이웃이 되어 버렸다. 제주 해안에 부는, 강한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가 나를 향해 흔드는 인사 같아 나도 싱긋대며 눈짓을 보낸다.


개인이 바랐던 함과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을 뒷받침하는 관계적 역량,
그 성취로서의 피어남.
나는 이것이 돌봄의 관점에서 따져 보아야 할 삶의 목적이자 행복의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 김준혁의 <돌봄의 역설> 중


처음 ‘피어남’ 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좀 촌스러운 번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florish, 번영, 번성이라는 말을 많이 써온 우리에게 ‘피어남’이라는 말은 좀 어색하달까? 그런데 그 날 이후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단어가 되었다. 돌봄으로써 서로를 피어나게 하는 존재, 그것보다 더한 관계가 어디 있겠나 싶은 마음이었다.

그 뒤 나는 어디서나 ‘피어남’이라는 던어를 널리 퍼뜨리는 사람이 되었다. 오죽 했으면 한 그림책 테라피 모임에서 닉네임을 정할 때도 “오늘 저의 닉네임은 <피어나>입니다. 부디 슈렉의 <피오나>로 기억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해서 좌중을 웃게 만들었다.

피어난다는 건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것.

피어난다는 것은
그 존재로서 인정받는 것.

피어난다는 건
그 다음을 또 기약하는 것.

피어난다는 건, 피어난다는 건
그냥 나인 것.

그 사이 계절이 흐르며 학교 교정에는 벚꽃과 수국이 개나리의 바톤을 이어 받아 피고 졌다. 저마다 자신의 영토에서 자신의 시간을 살며 피고 진다. 화양연화,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 난 이제 사람도 20대 청춘만이 아니라, 저 나무들처럼 자기의 때에 맞춰 매번 꽃 피울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아는 나이가 되었다.

똑똑똑! 내 옆에 자리하고 계신 당신은 안녕한가요? 피어나는 중인가요? 당신 곁에서 나도 피어나려 애쓰는 중입니다. 우리, 도움이 필요하면 서로 손 내밀기로 해요. 내 피어남이 당신에게 응원이 되도록, 당신의 피어남이 나에게 삶의 다정한 온기가 되도록 우리 꼭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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