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목숨 걸지마, 청춘도 걸지 마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by 평온

“당신의 일은

직 職 입니까? 업 業 입니까?”

가끔씩 나를 휘말리게 하는 문장들이 있다. 몇 달 전, 누군가 나에게 던진 선문답 같은, 이 질문도 그 중 하나다. 이제 그만 이 질문을 놓아 주자.

어미새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기새의 먹이를 물고 오던데, 우라 엄마는 일찌감치 나의 과외 자리를 물고 오셨다. 그 바람에 대입 학력고사 다음 날부터 나는 동네 꼬맹이들의 ‘선생님’이 되었다. 그 때부터 잠깐잠깐의 탈선 (멋진 편집자가 되고 싶은 적도 있었다.)을 제외하고 30년이 넘는 시간,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해 왔다. 서너 살, 이제 겨우 문장을 만들어 말하기 시작한 아이부터, 돈 많고 장성한 자식으로 모든 걸 이루었으나 한글을 모르는 게 유일한 한이시던 여사님 두 분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그러니 가르치는 걸 ‘사명’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으나 나의 업 業은 가르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게 답일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하는 일을 즐길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한 삶이겠는가? 문제는 자기 깜냥에 맞는 직 職을 선택하는 것일테다. 가르치는 일도 마찬가지다. 어디에서, 어떤 자리에 서서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 것이다.

사범대를 졸업했지만, 교사가 되기를 포기한 나. 그러다보니 상당수의 지인들이 교사이거나 교사 지망생이었다. 그런데다 혼자 힘으로 교사 딸을 꿈꾸며 바라지한 어머니가 석봉이 어머니처럼 버티고 있으니, 나의 직업 선택은 상당수 거기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었다. 교사라는 기회를 포기한 것처럼 그렇게 또 과감하면 좋을텐데, 스물여섯의 나이에 일찍 결혼을 했다는 것도 나의 선택을 좁게 만든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1997년, 전세금을 탈탈 털어 학원을 인수 받았다. 국가적으로는 IMF 사태로 위기였지만, 개인적으로는 호기였다. 그 당시는 양육수당이라는 건 상상 속에도 존재하지 않던 시기라 병설유치원에 떨어진 아이들이 학원 종일반으로 들어왔다. 매일이 전쟁이었다. 2명의 선생님과 기사님이 있었지만 아이들 간식과 점심을 챙기고, 치우고 나면 오후 초등수업을 시작해야 했다.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 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중



초등 학원비가 5만원, 학원 강사 월급이 30만원이던 시절, 교사에게 청소까지 시키기는 미안했다. 하루종일 전쟁을 같이 치룬 아이들과 선생님들을 다 집으로 보내고, 혼자 남아 패잔병처럼 마무리 청소를 했다. 30분 정도의 청소 시간, 나는 주문을 외며 대걸레질을 했다. 전 재산을 털었으니 성공해야 해, 내 목숨 다 걸었어, 꼭 잘 해 낼 거야. 그러나 그 주문은 나를 소진하고 소진하다 불태워 버리는 주문,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고 세상 재미난 일들을 모두 포기하게 하는 주문이었다. 일에 청춘도, 목숨도 걸어서는 안되는 거였다. 최근에 제과점을 개업한 사촌 동생에게도, 학원을 개원한 후배에게도 목숨 걸고 일하지 마라, 청춘 같은 거 여기에 걸지 마라 말해 주었다. 다 피가 되고 살이 될 말인데, 글쎄 그렇게 받아 들였을려나.

5년째 되는 해에 경주로 가족여행을 갔다. 신나게 놀고 돌아와서 충전된 에너지를 뿜뿜 뿜으며, 초심으로 돌아가 열심히 일했다는 결론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드라마틱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너무 싫었다. 도살장에 끌려가기 싫어 다리에 힘을 주며 버틴다는 소들이 그런 마음일까? 다시 또 내일부터 똑같은 일을 하는 게 너무나 싫었다. 아, 이제 그만 둘 때가 되었구나. 이제 정리하자. 그 후로 나는 일이 그만 두고 싶을 때마다 그 때만큼 싫은 마음이니? 묻는다. 퇴직의 여부를 결정하는 잣대 같은 기능이다.

초보 엄마, 초보 아내, 초보 원장, 열심히 앞만 보며 달렸던 내 뒤통수에 다닥다닥 ‘초보’ 딱지가 여럿 붙어있던 시절. 하루종일 소리 지르고 가르치고 일하느라 허리디스크를 훈장처럼 남기고, 나의 학원은 5년 만에 다시 다른 이에게로 넘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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